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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1 수업일기.hwp

 

 작년에 토요일 동아리를 진행하다가 왠지 흐지부지 되어서- 이번에는 좀 더 체계적으로 가보고자 다시 아이들을 모집했다. 작년에 잠시나마 활동했던 동아리원들은 전부가 다시 참여 의사를 밝혔고, 2학년 지원자 한 사람을 더 받아 총 8명의 인원으로 3월14일에 첫 수업을 가졌다. 첫 수업은 말 그대로 간단한 OT. 학사일정을 고려하여 격주를 기본으로 진행될 수업의 날짜를 잡았고, 독서와 신문에 기반하여 글쓰기와 말하기 수업을 진행해나갈 거라고 계획을 공지했다. 더해서 월별 주제를 정하고 관련되는 책을 선정하는 것도.

 그리고 3월 21일, 본격적인 첫 수업. e-NIE 선도학교로 지정은 되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사업이 시작되지 않아 독서로 물꼬를 트기로 했다. 오늘의 책은 <국어교과서 작품 읽기 - 중3 소설>. 총 11편의 소설 중 서로 다른 소설을 선택하여 ① A4 1/4의 색지에 세 줄로 줄거리를 요약하고 ② B4 용지에 그림 마인드맵으로 표현한 뒤 ③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기.

 기본적으로 읽고 쓰는 것에 흥미가 있는 아이들이라 작성 자체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내가 피드백을 해준 건 발표하는 태도 및 마인드맵 구성 정도. 그리고 담임 학급이 없는 대신 이 아이들에게 보내기 시작한 수업 일기. 일기라기에는 새로운 작품들 안내에 가깝다만, 배운 내용을 정리할 수 있으니 충분히 일기로서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한 이름도 <쓰담쓰담>. 쓰고 담고, 쓰고 담는 우리들의 이야기. 1년, 나에게도 후회가 남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힘내야겠다.

Posted by 玄月-隣


 여섯 째 날은 청산리 전투 터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 직소택. 무성한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며 독립군의 심정뿐만 아니라 어디서 나올 지도 모르는 적과 싸워야 되었을 일본군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원래 직소택에 가기 전, 백운평이라는 곳에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마을을 몰살시켜 지금은 빈 들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에 일어난 경신대토벌로 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아픈 그 역사들을 생각하자니 앞을 가리는 건 한숨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찾아간 곳은 일송정. 바로 <선구자>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정자가 썩 좋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일단 넘어가고, 옆에 서 있는 소나무가 그 ‘일송’인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원래의 소나무는 워낙 독립 운동가들의 성지 비슷하게 되다보니 일본군이 독약을 풀어서 말려 죽여 버리고 지금 있는 건 그 후손 뻘이라고. 다 같이 여기서 선구자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글쎄. 내게는 멀리 보이는 공동묘지 그 어디쯤에 있다는 윤동주의 무덤이 훨씬 와 닿았다.


 다음 여정은 용정중학교였다. 원래부터 있던 건물이 무척 예쁜데, 보존을 위해 전시관의 용도로만 사용한다고 했다. 실제 수업은 그 옆의 새 건물에서 이루어진다고. 이곳에서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흔적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시>의 시비부터가 그랬고, 그의 모습과 유물이 남아 있던 전시관에서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한가득 밀려왔다.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보던 곳은 저 언덕 어디쯤이려나.


 그리고 봉오동 전투 터. 안내자가 없었다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청산리 전투 터와는 달리 중국 정부에서도 인정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반면 봉오동 전투 터는 그 정확한 격전지를 모른다고. 

 사실 봉오동 전투는 그 자체의 전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항일 무장 투쟁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다. 무기를 들고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숨진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과 부모처자를 버리고 이곳에 온 독립군뿐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의 광풍에 휩싸여 강제로 동원되어 온 일본군들 역시도 추모하며 또 하루의 여정을 마쳤다.



 일곱 째 날은 본격적인 발해 유적 답사. 현지인들은 남대묘라고 부르는 흥륭사를 찾아갔다. 절 자체는 청나라 때 다시 지어진 건물이지만, 여기에는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발해 석등이 있단 말씀. 사진으로만 대하던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생기발랄한 느낌이었다. 유홍준의 부도 비유에 따르자면 빨간 하이힐을 신은 막내 딸 같다는.


 절 한쪽 구석에는 잠겨있는 집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에 유물 같은 것들이 보이길래 교수님께 여쭤봤더니 아직 검증이, 그리고 정리가 끝나지 않은 유물들이라고 말하신다. 궁금하지만 별 수 있나.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발해의 가장 오랜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원래 성벽의 위 아래로 보호석을 덧대어 놓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 게다가 안내판에는(간체자를 읽을 수 있다! 그토록 힘들고 짜증났던 동양사강독의 결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 발해를 당나라 때의 지방 정권 중 하나라고 써두고 있어서 좀 열받기도 했었고. 제6궁전까지 있는 이곳에서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건 제1궁전 터까지라고 한다. 내부에서는 ‘도굴식 발굴’로 파괴되는 부분이 많아 뜻있는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고 들었다. 어쨌든 성벽 위에 올라가니 생각보다 그 폭이 넓음에 놀랐다. 세로로 5개 가로로 10개의 주춧돌이 주욱 늘어서 있는데, 각 돌의 거리는 2m 정도. 원래 있었을 누각의 모습까지 함께 생각하자니 그 위용에 그저 경탄을 금치 못할 뿐이었고.


 발해의 특징을 나타내는 기와 또한 찾아본 뒤 옆에 있는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상경용천부의 복원 모형과 함께 문자 기록, 생활용품, 군사용품, 불교용품 등 다양한 물건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보다 눈길을 끄는 건 정효공주묘의 고분벽화였다.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지만 여전히 느낄 수 있던 그 호방함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발해 그리고 고구려를 얘기하며 빠질 수 없는 것은 동북공정이다.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났던 일은 모두 중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동북공정. 여기에 우리는 어떤 논리로 대응하고 있는지. 그저 감정만이 앞서서 사건이 생기면 불타올랐다가 잠시 뒷면 또 가라앉고 하는 것은 아닌가. 발해의 멸망 이후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 일부만 고려로 넘어갔을 뿐 대다수 피지배층인 말갈인은 요나라를 세웠고, 이후 금, 원, 명, 청을 거쳐 현재의 중화민국으로 흡수된 것이라는 중국의 논리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나. 결국은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 뿐. 실제로 설명을 해주신 교수님께 이와 같은 생각을 얘기하며 학자로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여쭤보았을 때, 그 분의 대답 역시도 같은 맥락 속에 있었다. ‘정치적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학자의 양심에 따라서 소신을 지켜라.’ 그러려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내 것으로 하는 수밖에.


 돌아가기 하루 전인 여덟 째 날. 날씨가 맑다는 얘기가 들리면 바로 천지로 가기 위해 일정을 여러 모로 조정해서 빠듯하게 돌아다녔지만 결국 실패하고, 대신 보다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발해에만 있는 독특한 유물 중 하나인 24개석을 본 것도 이날. 8개씩 3줄로 늘어선 돌은 무엇에 쓰이는 건지 그동안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지금은 역참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람 키를 넘는 옥수수 밭은 물론 장관이었지만 유적이 남의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건 어째 좀 씁쓸했다.


 그리고 연길의 가장 번화한 시장인 서시장도 구경할 수 있었다. 시장통의 작은 길 곳곳을 헤매고 다니며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던 시간들. 어디서나 시장의 모습은 비슷하더라.


 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도문에서 심양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밤새 달리기!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만큼 박진감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1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있는 건 결코 편한 일이 아니었다. 우등은커녕 우리나라 일반고속보다도 훨씬 좁은 좌석 간격은 내 짧은 다리도 구겨 넣기 힘들었고, 덜컹거리는 길과 배겨오는 엉덩이는 툭하면 잠을 깨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너른 들을 달려 나가는 밤기차는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다음번엔 기차를 타고 중국 일주를 하겠다는 야무진 꿈이 하나 생겼다.


   여행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것이다. 
   또 여행은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여행은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
   글 속엔 미처 다 담아내지 못했지만 함께 여행했던 많은 사람들,
   짧은 여정에 넘치도록 보고 들었던 관심사들과 그들이 불러일으킨 생각.
   그리고 그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 것을 넘치도록 고민할 수 있었던 나.
   모래바람을 먹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웃을 수 있던 것은 그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Posted by 玄月-隣

 다시 밝아온 넷째 날. 압록강을 따라 들어가며 백두산의 속살을 마음껏 구경했다. 예전과는 달리 강변도로가 나서 다니기는 편하지만 이는 관광이나 상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정치 상황이 급변하면 재빨리 군대를 투입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듣자 즐거운 기분이 얼어붙기도 했지만. 바로 강 건너로 보이는 게 북한 땅인데 국경을 따라가면서는 허가 없이 차를 세우거나 하면 큰일이 난다고 했다. 결국 좀 더 자세히 북한을 보고 싶은 마음은 달리는 차 속에서 찍은 서툰 사진 몇 장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잡아내야만 하는, 바꿔 말하자면 그만큼 체제에 자신이 없는 모습을 드러내는 초소와 해마다 일어나는 홍수의 원인이 되는 뙈기밭. 나무 한 번 하려면 사흘거리를 가야된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밥 짓는 연기가 끊긴지 오래 된 30여 년 전의 협동농장 건물과, 뗏목을 만들어 나무를 팔러 가는 사람들.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이용악의 시편들이 겹쳐져 보였다.



 사실 ‘역사기행’에만 눈이 멀어서 왔지만, 이날 본 북한의 모습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람을 살려놓고 보는 게 우선 아닌가, 왜 아직껏 이러고 있나 같은 현재에 대한 것부터 해방 3년사에 이르기까지 보고 들은 많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뭐라고 딱히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저 보고만 있기엔 참 가슴이 아팠다는 거.


 다섯 째 날의 아침은 유달리 바빴다. 백두산 등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준비를 마치고 나섰는데 이런- 비가 온다. 올해 우리나라에 장마가 늦은 만큼 이곳도 장마가 늦어져서 하필이면 그 기간이 겹친 것이다. 5위안(650원)짜리 우비를 하나 걸치고 산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겨우 들어갈 수는 있었는데, 발길은 비룡폭포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8일째 입산 금지라는데 어쩌겠는가. 천지에 손 담그고 그 파란 물을 직접 보는 건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아쉬움을 달래며 소천지로 향했다. 바람조차 자는 날이면 정말 거울이 따로 없다고 하는데, 비가 오는 날의 분위기도 꽤나 멋졌다. 호수 주변엔 자작나무가 유달리 많았다. 자작나무 껍질에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니 한 번쯤은 해보고픈 마음도 생겼지만 백두산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풀 한 포기 돌 하나라도 들고나가는 것이 걸리면 무조건 벌금이라는 거. 가난한 여행자에겐 참 제약도 많았다. 그리고 돌아본 백두산 원시림. 사람 키의 서너 배쯤은 우습게 아는 나무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백두산은 화산. 용암이 굳어서 만들어진 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뿌리들은 꿈틀거리는 그 생명력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척박한 땅에서도 수십, 수백 년을 굳건하게 살아온 것이 그저 신기할 뿐. 그런 굵직굵직한 나무들 틈으로 보이던 소담한 초롱꽃은 또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Posted by 玄月-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