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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19

공양(안도현)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 , 창비, 2008 가슴이 먹먹한, 그래서 더욱 받고 싶은 선물들. 햇살 두어 줄기로 예쁘게 포장해 준다면 좋겠어:) 덧. '평'은 이미 대치 불가능한 그 어떤 것, 아닌가. 이걸 왜 굳이 제곱미터라는 딱딱한 이름으로 바꿔야 할지. (08/06/30) 예쁜 것들을 보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네 근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리운 향기 삼세 평 머언 하늘, 내 마음처럼 움직이는 구름의 이동거리 한 치 앞 끊임 없이 이어지는 추억의 고리 일백여덟 발 잠깐 그.. 2014. 8. 24.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김이강) 1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말한다 조용한 눈을 늘어뜨리며 당신은 가느다랗고 당신은 비틀려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가만히, 당신은 서 있다 딱딱한 주머니 속으로 찬 손을 깊숙이 묻어둔 채 한동안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행인들에게 자꾸만 치일 것이고 아마도 누구일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돌아오고 따뜻한 커피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갔던가 2 오늘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장을 읽고 있다 이 책을 기억하는지 연필로 한 낙서를 지우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내게 겨울에, 당신은 묻는다 아무래도 이 책의 삼십칠 페이지에 있는 글씨가 내 글씨 같다고 안녕? 페이지 숫자가 마음에 든다 3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말자. 옆 테이블에서 .. 2014. 8. 12.
연보(김소연) 1967년 1974년 1980년 1983년 1986년 1990년 그리고, 마음 둘 데 없어 외로웠으므로 하늘을 나는 기구가 모래주머닐 떨어뜨리듯, 꾸던 꿈들을 떨어뜨리고서라도 높이높이 날아오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알게 되었다, 실하지 못한 날개로 파닥파닥 날아가 휘청대다 부딪치고 부딪치다 지쳐서 맴돌던 곳은 황색의 가등이었다는 것을. 가끔은 지독하게 사랑을 그리워했고 사랑의 냄새들을 못 견뎌내고 있었다는 것을. 지도상에 없는 섬처럼, 나뭇등걸 짙은 상처 골라 뿌리내리는 그 섬의 버섯처럼, 그늘과 이슬을 편애하는 것이 이 시대엔 얼마나 불가능한 시인가를 알게 되었다. 깊이 숨겨둔, 세계에 대한 내 마지막 자비를 빼내들곤 서른의 형제가 이 세상을 버리고 도망갔고, 편애하던 사랑이라든가 진실이라는 단어가.. 2014. 8. 11.
不醉不歸(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 , 문지, 1992 오랜만에 허수경의 시집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계속 마음에 서걱이는 .. 2014.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