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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밑줄 긋기6

080705 "옛날얘기 하나 할까?" "예." "옛날에 한 바람둥이가 있었지. 그런데 이 바람둥이는 연애를 할 때마다 우선 상대가 된 여자에게 치욕적인 상처를 주는 거야. 그래서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면 그때야 비로소 이 바람둥이는 여자를 사랑하는 거지. 왜 그랬을까?" "글쎄요." "이 바람둥이는 여자보다는 바로 자신이 만든 상처를 사랑했던 것이지. 그런데 이 바람둥이가 아직 어려서 여자를 몰랐을 무렵에는 어떤 식이었을까?" "………" "사진에 있는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로 상처를 입히는 식이었어." "어렸을 때 무슨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군요?" "아니, 흔한 사생아였을 뿐이야." 아마 그와 나는 둘 다 취한 표정이 아니었을 터였다. "이 바람둥이의 요즈음 희망이 뭔지 아니?" "그러구도 아직 희망이 남았어요.. 2014. 9. 1.
081125 마지노선(線)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저항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완벽한 지하시설과 당대 최고의 축성기술을 사용하여 프랑스의 마지노 장관이 십 년간 구축한 마지노선이 독일군의 우회공격으로 한순간에 어이없이 함락된 것처럼, 마지노선이란 단어는 결연한 그만큼의 위태로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반드시 지켜내고픈 마지막 자존심이나 자기 품위를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가장 일상적인 말은 '괜찮아요'입니다. '괜찮아요'라는 말은 '괜찮고 싶다'는 간절함이 묻어 있는, 실상은 썩 괜찮지 못하다는 반어법적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견뎌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무의식적 자기 고백입니다. 이 글을 보고 정혜신의 글을 한 번 더 찾아봐야겠다고 생각. 생각해보면 '괜찮아요'라고 말할 .. 2014. 8. 31.
101117. 김려 <유배객 세상을 알다> 중에서 시로 남은 연희와의 추억은 눈이 부시다. 봄날 그녀의 집 우물가에서 수정처럼 영롱한 앵두를 따서 함께 나누어 먹었던 연희,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꽃잎을 따서 그녀의 붉은 뺨과 자기의 흰 수염에 대보며 장난을 쳤던 연희, 긴 여름 장마 끝에 달이 뜨자 보고 싶은 마음에 신 신고 개울가로 나서니 어느새 작은 우산을 들고 치마를 끌며 술병을 들고 찾아온 연희, 달 뜨는 가을밤 낙엽 쌓인 그녀의 집 뜰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얘기가 다하면 손잡고 단풍나무 붉은 뜰을 함께 거닐던 연희, 펄펄 날리는 눈바람에 뚫어진 창으로 문풍지 펄럭이는 겨울밤 근심에 뒤엉켜 쓸쓸히 누웠는데 얼어붙은 눈길을 또각또각 밟고 와 화로에 술을 데우던 연희, 눈 그친 맑은 날 달은 밝고 촛불은 가물거리는데 따뜻한 양털 휘장을.. 2014. 8. 24.
100901.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중에서 허기와 피로 때문에, 밥 떠먹을 깨끗한 숟가락 하나도 남김없이 싱크대의 개수통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식기들 때문에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먼곳에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다는 것 때문에, 긴 비행시간 동안 겪은 소소한 일들과 이역의 기차에서 본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피곤해?'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괜찮아'라고 강인하고 참을성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외로웠다. 외로움 때문에 화가 났다. 내 몸이 보잘것없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게 엉겨붙지 않는 듯한 느낌, 어떤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한기, 무엇으로도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용케 스스로에게 숨겨왔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났다. 언제 어디에서나 혼자이며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2014.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