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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17

달밤(이시영) 용산성당 밑 계성유치원 담벼락, 한 애인이 한 애인의 치맛자락을 걷어올리자 눈부신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달님이 뽀시시 나왔다간 입술을 가리고 구름 속으로 얼른 들어가 숨는다. - , 창비, 2007 夜하고 野하되 속되지 않은. 이시영 시의 이런 능청스러움이 맘에 들어오는 요즈음:) (08/09/04) 급하게 출장을 나가느라 던져놓다시피 한 시나브로의 오늘자는 이시영의 '행복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몇 년 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이 시가 생각나더군요. 마침 계절도 사르르 풀려가고 있는 초봄이니 어울린다 싶더라고요. 아마도 겨울밤은 아니었을 겁니다. 날이 풀렸기에 연인의 속살을 슬쩍 내비칠 수 있었겠지요. 추운 날이었다면 오히려 서로를 감싸주기 바빴을 테니까요. 봄밤, 뽀얀 얼굴을 뽀시시 .. 2014. 3. 21.
沙平驛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 2014. 1. 7.
고목을 보며(신경림) 그 많던 꿈이 다 상처가 되었을 게다 여름 겨울 없이 가지를 흔들던 세찬 바람도 밤이면 찾아와 온몸을 간질이던 자디잔 별들도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게다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 꽃보다도 또 열매보다도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인데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 , 창비, 2008 나 역시 그랬건만- 여운이 남는다. '내게도'라는 한 마디가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이야. (08/03/14) 시를 처음 접한지 5년이 지났네요. 꽃피는 봄과 다르게 겨울을 앞둔 이 시점에서 다시 보는 시는 마음을 울리지 않습니다. 크게 .. 2013. 11. 12.
[책] 보름동안 만났던. 고종석(2010), 독고준, 새움 고종석(2003), 엘리아의 제야, 문지 고종석의 책을 다 읽어간다. 에세이와 시평집들은 출간 순으로, 소설은 역순으로. 소설이 역순이 된 까닭은 최인훈의 과 를 읽고 난 뒤, 까먹기 전에 을 먼저 잡았기 때문. 이후 꽤 오랜만의 장편 소설인 걸로 기억하는데 - 물론 이 은 사야 되는 책 목록 중 하나. 조만간 헌책방 발품을 팔아야 할 것 같다 - 기대했던 것보다는 고종석의 색채가 많이 묻어났다. 하긴, 그 문제인 독고준의 사유 방식을 온전히 따라가려면 내 사고가 먼저 파편화되겠지. 그래도 생각보다 쉽게 읽혀서 뭔가 의아했던. 그리고 . 책을 읽다가 뒷부분에 무언가 검은빛이 어른거려 넘겨봤더니- 그 때의 나는 꽤나 성실했었나보다. 앞 속지엔 '2003년 9월 5일 금요일.. 2012. 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