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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고목을 보며(신경림)

by 玄月-隣 2013. 11. 12.

그 많던 꿈이 다 상처가 되었을 게다
여름 겨울 없이 가지를 흔들던 세찬 바람도
밤이면 찾아와 온몸을 간질이던 자디잔 별들도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게다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
꽃보다도 또 열매보다도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인데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 <낙타>, 창비, 2008

 

나 역시 그랬건만-
여운이 남는다.
'내게도'라는 한 마디가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이야. (08/03/14)

 

 시를 처음 접한지 5년이 지났네요. 꽃피는 봄과 다르게 겨울을 앞둔 이 시점에서 다시 보는 시는 마음을 울리지 않습니다. 크게 다가왔던 '내게도'라는 한 마디가 남기는 여운도 글쎄요, 라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애달픈 달빛찬란한 꿈의 세계에서 너무 멀리 와버린 탓일까요? 그러기엔 좀 서글프고 많이 씁쓸한데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건, 상처에 무뎌지지는 말자는 것.

 

덧. 그때의 나는 또 같은 시인의 <눈>이라는 시의 일부를 가져왔더군요.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 지상에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었고, 노력했다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이 말에 부끄럽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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