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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沙平驛에서(곽재구)

by 玄月-隣 2014. 1. 7.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沙平驛에서>, 창비, 1993

 

1981년의 1월 1일의 아침을 겪어보고 싶다. (08/04/11)

 

 30여 년 전,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다지요. 그래서 저런 코멘트를 붙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시를 강의하시던 교수님이 이 시를 두고 등단작을 뛰어넘는 시를 못 쓰는 시인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셨던 것도 머리 한 구석에 남아있네요. 시인 본인도 그런 평을 의식했던가 봅니다. 최근 나온 <길귀신의 노래>에 보면 이 시를 투고하게 된 계기와 시의 배경에 대한 설명, 등단작이 대표작이 된 이후의 소회를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지요.

 대체 1980년대는 어떤 사회였기에 20대의 청년이 이와 같은 글을 써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 30여 년 뒤, 2013년의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을 돌아보며 똑같은 질문을 던질 누군가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시선이라면 그 답이 될까요. 그렇기에 한 줌의 톱밥이 한 줌의 눈물로 변하는 것이 가능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우리 시가 가닿은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덧. 역시나 남도 출신의 소설가 임철우는 이 작품의 모티브를 빌어 <사평역>이라는 소설을 냅니다. 이 모든 풍경을 그려내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쯤 찾아봐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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