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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달밤(이시영)

by 玄月-隣 2014. 3. 21.

 용산성당 밑 계성유치원 담벼락, 한 애인이 한 애인의 치맛자락을 걷어올리자 눈부신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달님이 뽀시시 나왔다간 입술을 가리고 구름 속으로 얼른 들어가 숨는다.

 

-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

 

夜하고 野하되 속되지 않은. 이시영 시의 이런 능청스러움이 맘에 들어오는 요즈음:) (08/09/04)

 

 급하게 출장을 나가느라 던져놓다시피 한 시나브로의 오늘자는 이시영의 '행복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몇 년 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이 시가 생각나더군요. 마침 계절도 사르르 풀려가고 있는 초봄이니 어울린다 싶더라고요.


 아마도 겨울밤은 아니었을 겁니다. 날이 풀렸기에 연인의 속살을 슬쩍 내비칠 수 있었겠지요. 추운 날이었다면 오히려 서로를 감싸주기 바빴을 테니까요. 봄밤, 뽀얀 얼굴을 뽀시시 내비친 달님은 그 광경을 보고 흐뭇했나봐요. 들킬세라 입술을 가리고 연인들이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구름 속에 숨어주는 센스를 발휘하니 말입니다.


 시 한 편이 더 생각난다 싶더니, 2010년의 이맘 때도 같은 느낌이었나 봅니다. 같은 시인의 '라일락 향'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이 시와 엮고 있었으니까요.


이 세상의 향기란 향기 중 라일락 향기가 그중 진하기로는
자정 지난 밤 깊은 골목 끝에서
애인을 오래오래 끌어안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


이제 곧 있으면 라일락도 환하게 피겠지.

아, 갑자기 브로콜리의 '봄이 오면'이 생각나 버렸다. 노래나 들으러 가자. (10/03/16)


 사실 저 작품이 실린 <무늬>가 94년 출판되었으니 이쪽이 먼저겠지요. 하지만 접한 순서 때문일까요? 왠지 '달밤'의 후일담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이야기를 좀 더 만들어볼까요.


 달님이 바라보는 앞에서 진한 손길을 나누는 연인은 아마 나이가 많지는 않을 겁니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가릴 것이 많아지고, 자꾸만 숨으려고 드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달님조차 슬쩍 비켜주게끔 하는 파릇파릇한 연인들. 치맛자락을 걷어올린 이후의 한 애인의 손은 어디로 갔을까요? 건강한 허벅지, 그 이상으로는 차마 올라가지 못했으리라 보는 건 혼자만의 생각이려나요. 설렘과 부드러움으로 가득한 손길과 차마 헤어지지 못하는 마음. 그 아쉬움이 오래오래 껴안고 온기를 전해주었겠지요. 집으로 들어간 한 애인과 골목길을 돌아 나가는 한 애인은 길고 긴 통화를 주고 받았을 겁니다. 맞잡고 있지는 못하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그 느낌은 기계의 온기를 통해서나마 전달되었을 테고요. 그 온기 속에 파고드는 달콤한 라일락 향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요. 행여 한 애인의 마음이 변하게 되어 두 사람이 더 이상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봄이 오면, 꽃이 피면- 문득, 생각이 날 지도 모를 일.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걸 보니, 봄은 봄인가 봅니다. 올 봄은 좀 봄답게 보내고 싶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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