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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19

단 한 번 본 죄(박규리)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가겠나. 마음이 가지 않는데 무슨 그리움이 파꽃처럼 싹트겠나. 파꽃처럼 쓰리고 아픈 향 뭐 때문에 피워올리겠나. 향이 없는데 팔뚝을 타고 혈관에 지져댈 뜨거움 어딨겠나. 하아 아픔이 없는데 타고 내릴, 온몸을 타고 내릴 눈물이야 당최 어딨겠나, 동안거 뜨거운 좌복 위에, 내가 없어서 그대도 없는데, 이제 와서 싸늘한 비구 이마 위로 울컥울컥 솟구치는 이 신열은, 그런데 이 신열은 - , 창비, 2004 오랜만에 꺼내보는 새 시네요. 10년이 지난 시집에 이렇게 말하기도 그렇습니다만. 사실 정리하는 지금도 이 시에 대한 마음은 왔다갔다합니다. 마음에 들어온 건 마치 한숨이 섞여있는 듯한 말투 때문이지요. 본 적에, 마음에, 파꽃에, 향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들도 시를 .. 2014. 6. 27.
달밤(이시영) 용산성당 밑 계성유치원 담벼락, 한 애인이 한 애인의 치맛자락을 걷어올리자 눈부신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달님이 뽀시시 나왔다간 입술을 가리고 구름 속으로 얼른 들어가 숨는다. - , 창비, 2007 夜하고 野하되 속되지 않은. 이시영 시의 이런 능청스러움이 맘에 들어오는 요즈음:) (08/09/04) 급하게 출장을 나가느라 던져놓다시피 한 시나브로의 오늘자는 이시영의 '행복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몇 년 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이 시가 생각나더군요. 마침 계절도 사르르 풀려가고 있는 초봄이니 어울린다 싶더라고요. 아마도 겨울밤은 아니었을 겁니다. 날이 풀렸기에 연인의 속살을 슬쩍 내비칠 수 있었겠지요. 추운 날이었다면 오히려 서로를 감싸주기 바빴을 테니까요. 봄밤, 뽀얀 얼굴을 뽀시시 .. 2014. 3. 21.
천둥벌거숭이 노래 1(고정희) 지도에도 없는 숲길을 갑니다 태양이 호수에서 금발을 흔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바흐의 악보를 오솔길에 깔았더니 무반주 첼로의 서늘한 그림자가 지구의 머리칼에 고요히 걸립니다 내가 당도할 문은 아직 멀었습니다 숲에 별 뜨고 바람 부는 밤 모든 언어에 빗장을 지른 뒤 찔레꽃 향기가 심장을 가릅니다 어둠뿐인 하늘에 당신을 그립니다 오늘밤은 이것으로 따뜻합니다 - , 문지, 1994(재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며, 심장을 가르는 찔레꽃 향기를 느끼는 밤. 그야말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로구나. +) 시집 뒤편, 시인의 말. 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밤하늘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별빛처럼 아름답게 떠 있고, 날이.. 2014. 3. 4.
고통의 축제 2 中에서(정현종) 그림자가 더 무거워 머리 숙이고 가는 길 피에는 소금, 눈물에는 설탕을 치며 사람의 일들을 노래한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이어니 - , 문지, 1995(재판)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에 문득 동의하고 만다. 짧지도 않은 교원대의 가을이 왜 이렇게 길기만 한지. (08/10/18) 아마 늘 그랬듯 스산한 가을날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계절보다 마음이 더 시렸을 테지요. 그래서 치기어린 나이에 시인의 말에 동의를 했을 지도요. 물론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피에 소금을 친다면, 눈물에 설탕을 친다면 무슨 맛일까 하고요. 간간한, 그러면서도 끝에 쇠맛이 약간 감도는 피. 무색무취무미인 듯하지만 혀끝에 알게 모르게 아린 맛을 남기는.. 2014.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