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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단 한 번 본 죄(박규리)

by 玄月-隣 2014. 6. 27.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가겠나. 마음이 가지 않는데 무슨 그리움이 파꽃처럼 싹트겠나. 파꽃처럼 쓰리고 아픈 향 뭐 때문에 피워올리겠나. 향이 없는데 팔뚝을 타고 혈관에 지져댈 뜨거움 어딨겠나. 하아 아픔이 없는데 타고 내릴, 온몸을 타고 내릴 눈물이야 당최 어딨겠나, 동안거 뜨거운 좌복 위에, 내가 없어서 그대도 없는데, 이제 와서 싸늘한 비구 이마 위로 울컥울컥 솟구치는 이 신열은, 그런데 이 신열은

 

-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2004

 

 오랜만에 꺼내보는 새 시네요. 10년이 지난 시집에 이렇게 말하기도 그렇습니다만.

 사실 정리하는 지금도 이 시에 대한 마음은 왔다갔다합니다. 마음에 들어온 건 마치 한숨이 섞여있는 듯한 말투 때문이지요. 본 적에, 마음에, 파꽃에, 향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생각들도 시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한몫 합니다. 하지만 품에 안겼던 시는 다시금 빠져나갑니다. 마침표로 이어지던 비교적 정돈된 느낌이 쉼표의 가쁜 호흡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에 와서 풀리거든요. 긴장이 일순간에 확 놓여지는 바람에 무어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뒷맛이 애매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한번 더 읽어보게 되는 건 나 역시 신열을 앓고 있기 때문일까요. '단 한 번 본 죄'라는 제목 위로 '평양성에 해 안 뜬대도 / 난 모르오, // 웃은 죄밖에.'라는 시구가 자꾸만 겹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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