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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천둥벌거숭이 노래 1(고정희)

by 玄月-隣 2014. 3. 4.

지도에도 없는 숲길을 갑니다
 
태양이 호수에서 금발을 흔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바흐의 악보를 오솔길에 깔았더니
 
무반주 첼로의 서늘한 그림자가
 
지구의 머리칼에 고요히 걸립니다
 
내가 당도할 문은 아직 멀었습니다
 
숲에 별 뜨고
 
바람 부는 밤
 
모든 언어에 빗장을 지른 뒤
 
찔레꽃 향기가 심장을 가릅니다
 
어둠뿐인 하늘에 당신을 그립니다
 
오늘밤은 이것으로 따뜻합니다

 

- <지리산의 봄>, 문지, 1994(재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며,
심장을 가르는 찔레꽃 향기를 느끼는 밤.
그야말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로구나.
 
+) 시집 뒤편, 시인의 말.
 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밤하늘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별빛처럼 아름답게 떠 있고, 날이 밝으면 우리가 다시 걸어가야 할 길들이 가지런히 뻗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 길에 등을 돌릴 수도, 등을 돌려서도 안 되며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꼭 울게 됩니다. 내게는 눈물이 절망이거나 패배가 아니라 이 세계와 손잡는 순결한 표징이며 용기의 샘입니다. 뜨겁고 굵은 눈물 속으로 무심하게 걸어 들어오는 안산의 저 황량한 들판과 나지막한 야산들이 내게는 소우주이고 세계 정신의 일부분이듯이, 그리운 이여, 내게는 당신이 인류를 만나는 통로이고 내일을 예비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함께 떠받치는 하늘에서 지금은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무섭게 창틀 밑을 흔드는 계절일지라도 빗방울에 어리는 경건한 나날들이 詩의 강물 되어 나를 끌고 갑니다.
(12/08/19)

 

 예전에 썼던 글들을 읽다보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얘기하고팠던 그 치기어림에 피식, 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2012년이면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인데 그때 써둔 글은 새삼 얼굴을 붉어지게 하네요.

 그리고 그때도 그랬듯, 시인의 말이 시보다 더 마음을 건드리고 지나갑니다. 특히 새 학기를 시작해서 정신 없는 일상 중에는 더욱 그러하지요. 날이 밝으면 다시 걸어가야 할 길들이 가지런히 뻗어 있고요, 매일 아침 만날 수 있는 예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도 없어요. 작년과 재작년, 힘들었다고 말은 하지만 지나고보니 좋았던 일들이 더 많이 생각나는 걸요.

 그래서, 내일도 다시 걸어갈 힘을 얻습니다.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나은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나의 모습을 그리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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