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함께/밑줄 긋기

080705

by 玄月-隣 2014. 9. 1.

 "옛날얘기 하나 할까?"

 "예."

 "옛날에 한 바람둥이가 있었지. 그런데 이 바람둥이는 연애를 할 때마다 우선 상대가 된 여자에게 치욕적인 상처를 주는 거야. 그래서 여자가 피투성이가 되면 그때야 비로소 이 바람둥이는 여자를 사랑하는 거지. 왜 그랬을까?"

 "글쎄요."

 "이 바람둥이는 여자보다는 바로 자신이 만든 상처를 사랑했던 것이지. 그런데 이 바람둥이가 아직 어려서 여자를 몰랐을 무렵에는 어떤 식이었을까?"

 "………"

 "사진에 있는 자신의 얼굴에 면도날로 상처를 입히는 식이었어."

 "어렸을 때 무슨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군요?"

 "아니, 흔한 사생아였을 뿐이야."

 아마 그와 나는 둘 다 취한 표정이 아니었을 터였다.

 "이 바람둥이의 요즈음 희망이 뭔지 아니?"

 "그러구도 아직 희망이 남았어요?"

 "그럼, 남구말구. 뭐냐면 말이야, 글쎄, 뻔뻔하게도 또다시 연애를 하는 것이래지 뭐냐? 뭐, 인제야말로 연애가 뭔지 아겠다나 어쨌다나 하면서."

 "그만하면 존경할 만하군요."

 "존경은 필요 없구, 냅둬라. 그길로 가다가 뒈져버리게."

 나의 말에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짓던 그가 배시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저도 옛날얘기 하나 할까요?"

 "너도?"

 "예."

 "해봐."

 "옛날에 사회주의자가 한 명 있었는데요."

 "그래서?"

 "아직도 사회주의를 안 버렸대요."

 그는 이제 웃고있지 않았다. 나는 웃고 있지 않은 얼굴을 향해 말했다.

 "당연하지. 그 캄캄한 나이에 그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남겠니?"

 

- 송기원, <아름다운 얼굴> 중에서


'존경은 필요 없구, 냅둬라.'에서 피식. 이제 나도 자랐다, 는 느낌이 확 와닿았달까.

그러다 '뒈져버리게'라는 한 마디에서 완전 뒤집어졌다는.

그리고 '그거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남겠니?'라는 말.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 깔린 희망 같은- 역시나 사람을 위안하는 문학을 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리 너 모르구 있댄? 나가 옛말하문서 갈체주었잰이. 너 가는 길에 부탁하는 사람덜 많이 만난다구. 제 괴로움이 무엇 때문인지 자꾸 물었지비.

 응, 바리공주님이 저승 가서 알아가주구 오갔다구 기랬대서.

 오라, 기러니까디 대답을 준비해둬야 하갔구나.

 저승을 가야 알지.

 거저 살다보문 대답이 다 나오게 돼 이서.

 말 다르구, 생김새 다르구, 사는 데가 다른데두?

 할머니가 주름이 오글오글하게 가만히 웃는다.

 거럼, 세상이나 한 사람이나 다 같다. 모자라구 병들구 미욱하구 욕심 많구.

 내가 덧붙인다.

 가엾지.

 우리 바리가 용쿠나! 가엾은 걸 알문 대답을 알게 된다니까디.

 

- 황석영, <바리데기> 중에서


모자라구, 병들구, 미욱하구, 욕심 많구. 그럼에도 가여워서 차마 아니 돌아볼 수 없는.

사랑-사람-삶의 이미지가 저렇게 구현된다는 게 수긍되고야 만다. 이젠 나이가 든 걸까.

'책과 함께 > 밑줄 긋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1125  (0) 2014.08.31
101117. 김려 <유배객 세상을 알다> 중에서  (0) 2014.08.24
100901.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중에서  (0) 2014.08.19
080701  (0) 2014.08.10
060801  (0) 2014.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