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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밑줄 긋기

100901.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중에서

by 玄月-隣 2014. 8. 19.

 허기와 피로 때문에, 밥 떠먹을 깨끗한 숟가락 하나도 남김없이 싱크대의 개수통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식기들 때문에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먼곳에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다는 것 때문에, 긴 비행시간 동안 겪은 소소한 일들과 이역의 기차에서 본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피곤해?'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괜찮아'라고 강인하고 참을성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외로웠다. 외로움 때문에 화가 났다. 내 몸이 보잘것없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게 엉겨붙지 않는 듯한 느낌, 어떤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한기, 무엇으로도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용케 스스로에게 숨겨왔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났다. 언제 어디에서나 혼자이며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 '내 여자의 열매' 中


 아주 어두워지면……

 그가 말한다.

 아주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만져지고 안 들리면, 꿈속같이 고요해지면, 그 캄캄한 곳에서, 그때……

 그는 말을 끊는다.

 그때?

 그때 무서워하거나 쓸쓸해하지 말아.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

 그녀는 불쑥 화가 난 시늉을 한다.

 왜 그런 말을 해. 너나 잊지 말아.

- '아홉 개의 이야기' 속 '세월' 中


 그것이 어떤 여행이었든, 장기간의 여행이 끝난 뒤 식당에 둘러앉은 일행은 대체로 말이 없습니다. 여행을 시작하던 때의 크고 작은 흥분과 두려움들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지요. 그저 각자의 피로를 견디며 말없이 밥을 먹는 것입니다. 뜨거운 밥을 후후 불며 깔깔한 혓바닥으로 반찬을 삼킵니다. 아스피린 가루를 풀어놓은 것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혓바늘 돋은 입속에 굴러다니는 밥알의 생경한 감촉을 느끼며 함께 견디는 것입니다. 마치 산다는 일이 오랫동안 그래왔다는 듯이, 아무도 과장되게 웃거나 짜증내거나 농을 던지거나 분위기를 바꾸어보려 하지 않습니다. 젓가락을 들었다 놓는 소리, 후루룩 국 넘어가는 소리, 깍두기나 열무김치를 씹는 소리들만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조용히 섞일 뿐입니다.

- '흰 꽃' 中


일기 정리가 아니었더라도, 최근에 다시 한 번은 발견하고야 말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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