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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연보(김소연)

by 玄月-隣 2014. 8. 11.

 1967년

 1974년

 1980년

 1983년

 1986년

 1990년

 그리고, 마음 둘 데 없어 외로웠으므로 하늘을 나는 기구가 모래주머닐 떨어뜨리듯, 꾸던 꿈들을 떨어뜨리고서라도 높이높이 날아오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알게 되었다, 실하지 못한 날개로 파닥파닥 날아가 휘청대다 부딪치고 부딪치다 지쳐서 맴돌던 곳은 황색의 가등이었다는 것을. 가끔은 지독하게 사랑을 그리워했고 사랑의 냄새들을 못 견뎌내고 있었다는 것을. 지도상에 없는 섬처럼, 나뭇등걸 짙은 상처 골라 뿌리내리는 그 섬의 버섯처럼, 그늘과 이슬을 편애하는 것이 이 시대엔 얼마나 불가능한 시인가를 알게 되었다. 깊이 숨겨둔, 세계에 대한 내 마지막 자비를 빼내들곤 서른의 형제가 이 세상을 버리고 도망갔고, 편애하던 사랑이라든가 진실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찬란한 헛것인가를 실감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존재하진 않아도 존재했었다는 신화를 새겨 읽으며 책장을 넘기고, 때묻은 손을 씻는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다시는 그 물이 아닐 이토록 찬물을 만진다.

 

- <극에 달하다>, 문지, 1996

 

 쭈욱 써내려 간 연도들을 눈여겨 봅니다. 67년은 시인의 출생연도라지요. 그렇다면 74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갔을테고, 80년에는 중학생이, 83년에는 고등학생이 되었겠네요. 86년과 88년이라는 두 개의 국제대회를 대학생 신분으로 맞이했겠고요, 90년이면 아마 대학원생쯤. 93년부터 동인으로 활동했다고 되어 있으니 이후에는 '그리고'라는 부사로 연결짓는 게 맞겠네요.

 그렇다면 이 시는 시인의 내밀한 자기 고백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쓰는 사람으로 살기 시작한 때. 마음 속에는 수만가지 생각이 오갔겠지요. '높이높이 날아오르고 싶어'한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누구든 한번쯤은 꿈꿔보았을 테지요. 하지만 도착한 곳은 '지도상에 없는 섬'이었을 따름입니다. 그 먹먹한 '불가능'함. 잡고 싶지만 잡히지 않는 '찬란한 헛것'. 아니 갈 수는 없다는 깨달음과, 그럼에도 언제 닿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오가며 살아가는 삶이라니요.

 여기서 끝났다면 넋두리일 수 있을 것을- 기어코야 한 마디 덧붙이고 맙니다. 아마 '다시는 그 물이 아'니겠지만, 여전히 '이토록 찬물을 만'지고 있을 시인. 그 시인이라는 굴레는 결국 어찌할 수 없다는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그렇게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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