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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김이강)

by 玄月-隣 2014. 8. 12.

1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말한다 조용한 눈을 늘어뜨리며


당신은 가느다랗고 당신은 비틀려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가만히, 당신은 서 있다 딱딱한 주머니 속으로

찬 손을 깊숙이 묻어둔 채 한동안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행인들에게 자꾸만 치일 것이고

아마도 누구일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돌아오고

따뜻한 커피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갔던가


2

오늘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장을 읽고 있다

이 책을 기억하는지

연필로 한 낙서를 지우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내게

겨울에, 당신은 묻는다 아무래도

이 책의 삼십칠 페이지에 있는 글씨가 내 글씨 같다고


안녕? 페이지 숫자가 마음에 든다


3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말자.

옆 테이블에서 젊은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말들 끝에 찻잔을 비우고 헤어진다

희미한 그림자들로 어떻게

대낮의 거리 한복판을 버티어낼까 망설이며

길 끝으로 사라져가고 있을 것이다


4

어느 거리에선가,

당신은 누구일지 모를 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가느다랗고, 비틀리는 누군가를

그리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문학동네, 2012

 

제목이, 푸른빛 표지가, 뒤표지 위로 날아다니는 붉은 점들이

한꺼번에 눈을 덮쳐와서 살 수밖에 없었던 시집.

걷고 있는 도중에, 지하철 속에서 덜컹거리는 와중에

손에 들고 있었기에 길 끝으로 사라지는 것들에 더욱 공감하며. (12/12/25)

 

 가느다랗고, 비틀려 있는 당신. 나와 당신의 시간이 엇갈리는 동안에도 어김없이 시절은 지나가지요. 입추가 지나자 거짓말처럼 시원해지는 아침저녁을 보며 모든 것을 이기는 시간의 무심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 이 시가 다시 손에 들어온 건 우연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책에 연필로 글을 쓰는 습관은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책장 구석구석을 수놓는, 책을 주고 받은 기억들. 오래된 책에서 문득 마주치는 아주 예전의 나. 가끔 낯 뜨거울 정도로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역시 내가 보낸 시간의 흔적들 아니겠어요? 차마 지울 수도 없는.

 "편도를 타고 가서 돌아오지 말자."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는 '삶'이라는 이름의 편도선을 타고 있지요.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만약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똑같은 시행착오를 똑같이 견뎌낼 생각을 하면- 아아, 싫어요. 날 그냥 여기 내버려둬요.

 어느새 끝이 보입니다. 처음과 같은 말이 되풀이되어요.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가느다랗고 비틀리는 나를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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