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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散文詩 2(신동엽)

by 玄月-隣 2014. 8. 6.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40여년 전, 신동엽 시인이 꿈꾸었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살고 싶은 나라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칫솔 사러 나오는 나라.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선거철에만 시장에 나와 사진 한 장 찍어버리지 말고, 스스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자기 손으로 사면 민심이라는 게 저절로 보이지 않을까요. 더 이상 유명한 축구 감독과 아들이 사진을 찍고 나랏돈으로 손녀가 해외에 나갔다고 신문에 기사가 나는 대신 삶을 살아가는 대통령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그런. 말로만 ‘보통사람입니다’를 외치지 않고, 포스터에 그린 그림 하나에 발끈해서 실형을 선고하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퇴근하는 광부들의 주머니에 책이 있는 나라. 크레인 위에 올라가 계절이 몇 번씩 바뀌도록 내려오지 못하거나 당장 밥 먹을 곳이 없어 화장실 한 켠에서 밥을 먹는 상황에서는 책을 읽을 여유가 생길 수 없습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이 지켜지며, 최저 임금을 한 달동안 받았을 때 노동자 평균 월급의 절반 정도는 보장되는 나라라면 출퇴근길을 이용해 책 한 권쯤은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땀 흘려 일한다면 누구나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책 얘기가 나온 김에 조금만 더 말해볼까요. 하이데거니 러셀이니 헤밍웨이니 장자니 하는 책들의 제대로 된 번역판을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다면 굳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오렌지냐 ‘어륀지’냐를 따지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래서 스스로가 발 딛고 있는 땅에서도 깊은 공부를 할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국무총리가 줄 서서 기차표를 사는 나라. 이런 나라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수많은 민생 현안들은 젖혀두고 자신들의 연금을 올리는 법에만 일제히 찬성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요. 기차라는 대중교통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기자들이 자기 차를 타고 다니게 되면서부터 신문에서 대중교통에 대한 기사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대학 나온 농민들이 트럭을 굴리고 별장에 살 수 있는 나라. 농민이라니 우선 먹을거리가 먼저 떠오릅니다. 먹을거리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그 먹을거리에는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라 자조하는 농민들의 눈물과 한숨이 섞여있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반값 등록금 문제 역시 중요하지만, 이와 함께 과다한 학벌 사회에서 벗어나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누구든 별장을 가지고 그 곳에서 살 수 있다면 좋겠지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그에 앞서 사는 곳 따위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지휘자나 극작가의 이름엔 훤한 나라. 그렇다면 정권교체 후 문화방송이 많이 탄압받았던 이유가 ‘MB, C*'이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통하지 않겠지요. 그래도 좋습니다. 저 멀리 요순시절부터의 꿈이니까요. 지휘자나 극작가의 이름에 훤하다는 건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좋은 공연들이 많이 열리며 기꺼이 돈을 내고 갈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쌀이나 김치 남는 게 있으면 빌려달라는 안타까운 말을 마지막으로 하는 젊은 예술가가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어느 쪽이든 총 쏘는 야만에는 가담하지 않는 나라. 파아란 젊음을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 경제적인 가치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지도 않는 걸요. 바른말을 하자면, 사실 다른 나라의 전쟁을 기회로 자신의 배를 불린다는 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사람을 상처내는 건 어떤 것이라도 거부할 수 있는, 오히려 ‘몇 잔의 커피 값을 아껴 지구 반대편’까지도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않아도 잘 노는 어린이들이 있는 나라. 어느 순간부터 골목이 없어지더니 골목에서,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학원에 지쳐 컴퓨터 앞에 박제된 아이들만 남았지요. 그래도 이 아이들이 행복한 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아빠에게 나온 소환장을 들고 사진을 찍힌 아이나 용산에서, 포이동에서, 두리반에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살던 동네에서 계속 살지 못하고 쫓겨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아빠를 잡아간 무서운 아저씨들이 내리는 차’라면서 버스 타기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랬듯 놀이터에서, 골목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돈 내지 않고도 맑은 물 맑은 공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나라, 나와 다른 말을 쓰는 사람을 흰눈으로 보지 않는 나라, 타고난 성별의 차이가 기회의 차이로 이어지지 않는 나라…… 이야기를 다 풀어놓자면 끝이 없겠지요.

 

 커져만 가는 생각을 어떻게 매듭지을까 고민하다가 백범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그렇습니다. 아마 이렇게 꿈꾸는 세상이 이루어진다면 아름다운 나라라고 감히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나라를 꿈꾼다는 것이 불온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2011년 7월. 열린아카데미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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