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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강의 간섭 - 겨울에게(윤석정)

by 玄月-隣 2014. 8. 8.

 그럼에도 이제야 나는 간섭이 심했던 네가 그리워야 너는 나무를 흔들어 내게 한해살이 빼곡한 곡절들 적어 나뭇잎 엽서 몇 통을 보냈어야 너는 입 오물거리는 우렁이들이 돌멩이마다 달라붙어 낮잠 자도록 했어야 네가 혹독하게 간섭한 뒤에야 가장귀에서 새순들이 꿈틀거렸고 사방으로 들꽃들이 만발했어야 그럼에도 네가 간섭이 심하다고 징징거리던 나야 여태 철없이 흐를 수 있을 만큼만 갔지 어디 쫌이라도 정 붙일 데가 없었어야

 네 간섭으로 내 살갗이 얼어 단단해지는 게 싫었어야 그게 냉동된 불감증 같아서 더 싫었어야 그렇잖아도 이놈 저놈이 찾아와서 똥오줌 싸지르듯 함부로 나를 요렇게 조렇게 막아대고 파헤치고 난린데 너마저 간섭해서 왜 나를 못살게 구는지 몰랐어야 참말로 간섭이 지긋지긋했어야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네가 눈보라 퍼부었다고 툴툴거렸어야 네가 보내준 엽서는 읽지도 않았어야 네 꼴 보기도 싫다는 내색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아래로만 흘렀어야 그럼에도 네가 내 이마에 입술 비벼대던 차디찬 촉감이 싸악 녹아버린 뒤에야 네가 그리워야

 너에게도 흐르는 일이 간섭 때문인데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야 간섭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게 하는 줄도 몰랐어야 그럼에도 네가 나를 그렇게 간섭한 뒤에야 나는 더 깊이 흘렀어야 우렁이가 내 속을 헤집고 다니도록 나무가 잎 밀어내도록 꽃마다 봉오리 나오도록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줄곧 간섭하고 있었어야

 

- 고은 외 99명, <꿈속에서도 물소리 아프지 마라>, 아카이브, 2011

 

 4대강 사업이라는, 잘 흐르는 강을 건드리겠다는 무지막지한 발상은 대체 어디서 시작했을까요? 많은 사람의 우려에도 이름을 바꾼 사업은 슬그머니 시작되었고, 생태계가 변해가는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장 눈 밝은 사람들 중 한 무리가 작가일진대, 이런 일들을 그냥 넘어갈 수 없지요. 국토 난개발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사업에 대한 작가들의 응답이 시집 한 권과 수필집 한 권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참여 역시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작가는 글을 쓸 때 가장 작가다운 것 또한 사실이지요.


 비가 오던 엊그제, 책장을 넘기며 '-야'라는 어미가 마음을 건드렸는지 모릅니다. '그립다'보다 '그리워야',' 했어'보다 '했어야'. 그러면서 강은 마치 푸념하듯 넋두리하듯 겨울에게 말을 건넵니다.

 대부분의 인연이 그렇듯 강 역시도 겨울이 지나간 뒤에야 겨울의 간섭을, 시린 그 느낌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땐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툴툴거렸던 일들. 지나고나니 나를 더 깊게 했던 많은 일들. 강은 그렇게 조금씩 깊어가지요.


 깊어가는 그 강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 강은 굽이쳐 흘러갈 때 가장 강다운 것 아닐까요? 자연의 어떤 것도 곧은 직선을 유지하지는 않습니다. 휘어지고 여울지는 것이 강의 본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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