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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노래가 아니었다면(심보선)

by 玄月-隣 2013. 11. 13.

 결점 많은 생도 노래의 길 위에선 바람의 흥얼거림에 유순하게 귀 기울이네 그 어떤 심오한 빗질의 비결로 노래는 치욕의 내력을 처녀의 댕기머리 풀 듯 그리도 단아하게 펼쳐놓는가 노래가 아니었다면 인류는 생의 완벽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 강물은 무수한 물결을 제 몸에 가지각색의 문신처럼 새겼다 지우며 바다로 흘러가네 생의 완벽 또한 노래의 선율이 꿈의 기슭에 우연히 남긴 빗살무늬 같은 것 사람은 거기 마음의 결을 잇대어 노래의 장구한 연혁을 구구절절 이어가야 하네 그와 같이 한 시절의 고원을 한 곡조의 생으로 넘어가야 하네 그리하면 노래는 이녁의 마지막 어귀에서 어허 어어어 어리넘자 어허어 그대를 따뜻한 만가로 배웅해주리 이 기괴한 불의 나라에서 그 모든 욕망들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새카만 재로 소멸하는 그날까지 불타지 않는 것은 오로지 노래뿐이라네 정말이지 그러했겠네 노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생의 완벽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지, 2008

 

이적의 <노래>를 서두로 글을 썼던 게, 그러고보니 벌써 5년이 넘게 흘렀구나.

그리고 그 때의 내 마음 같던 시를 2009년에 만나며

꿈을 꿀 수 있게 해 줬던 노래, 그 노래가 아니었다면-

되뇌어 보았다. (13/05/06)

 

 시는 예전에 詩歌, 노래의 형태로 존재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인지 어떤 시들은 그대로 노래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노래에 대한 시는 마치 소설에 대해 말하는 소설 같기도 해요. 혹은 재귀대명사랄까요.

 최근 <모든 게 노래>라는, 예쁜 노란색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노래를 두고 '무자비한 시간을 견뎌내는 가장 짜릿한 마법'이라고 말하지요. '노래가 없었다면 우리의 계절은 훨씬 흐리멍텅했을 것이다. 봄꽃은 덜 아름다웠을 것이고, 여름은 덜 더웠을 것이며, 가을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겨울은 덜 추웠을 것이다. … (중략) … 모두 자신만의 노래가 있을 것이다. 모두들 그 노래를 잊지 않고 계속 불렀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그렇습니다. '노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생의 완벽을 꿈도 꾸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오늘도 잠들기 전, 귓가에 속삭일 노래를 고릅니다. 오래도록 계속될 노래의 힘을 믿으며 꿈의 세계로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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