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소립자 2(허연)

by 玄月-隣 2013. 10. 29.

 기억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은 이미 낡은 것이다.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고 있던 줄무늬 장갑이라든지, 부시시 깨어나 받는 전화 목소리라든지, 술에 취했을 때 눈에 내려앉는 습기라든지.

 

 낡은 것들이 점점 많아질 때 삶은 얼마든지 분석이 가능하다. 어떤 오래된 골목길에 내가 들어섰던 시간, 그 순간의 호르몬 변화, 가로등 불빛의 밝기와 방향, 그날의 습도와 주머니 사정까지. 나를 노려보던 고양이의 불안까지.

 

 그 골목에서 이런 것들이 친밀감의 운동을 시작했고 나에게 수정되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했고, 누구는 그날 파열음이 들렸다고 했으며, 누구는 그날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 분석해야겠다. 

- <내가 원하는 천사>, 문지, 2012

 

 시가 눈길을 끌었던 건 아마 마지막 행 때문이었겠지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한 발레리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중략)…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슬쩍 주저 앉은 남진우와, 약간 옆으로 비껴나서 '날이 저문다 바람이 분다 / 바람이 불면 한 잔 해야지'라고 건네오는 이시영의 목소리가 마지막 행 위로 겹쳐집니다. 그렇지만 이건 뭡니까. 분석해야겠다니요.

 '낡은 것들이 점점 많아질 때 삶은 얼마든지 분석이 가능하다'는 시인의 말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기억이라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 그래서 낡아버린 순간들을 되새깁니다. 많이들 가지고 있잖아요.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지던 그 순간.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는, 우리 한쪽 어깨만 젖기로' 하던 약속.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던 나직한 목소리. '그대의 향기 가득한 한겨울밤 달빛의 입맞춤'이 주던 따스함 같은 것들. 그 낡음은 더 이상 수정되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영원히 고정된 현재인 거지요. 사랑, 말입니다.

 내 귓가에 들리던 파열음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말하겠지요.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좋습니다. 그 파열음-균열의 시작은 내가 다시 균열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말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사랑을 알기 전과 알고난 후의 나는 이렇게나 다른 걸. 그래서 나는 계속 분석하지만, 다들 알고 있습니다. 원래 이유라는 건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고보니 마지막 행은 꽤나 쓸쓸하게 들리는군요. 바람이 분다. 분석해야겠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맛있는 공부 > 시를 읽는 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래가 아니었다면(심보선)  (0) 2013.11.13
고목을 보며(신경림)  (0) 2013.11.12
別於曲(허연)  (0) 2013.10.25
강(황인숙)  (0) 2013.10.23
봄(오규원)  (0) 2013.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