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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別於曲(허연)

by 玄月-隣 2013. 10. 25.

 그대의 날들은 길어서 홍적세의 긴 틈새를 지나 오늘도 남아 있네. 저 아프게 날선, 서리 내리는 날, 끝도 없는 기다림은 언제까지인지.

 

 이루지 못한 것을 기억하는 새들은 오늘도 서쪽으로 날아가고, 그대 세월에 갇혀 오지 못하는 꿈에서 간신히 깨어

 

 덜컹대는 이번 세기의 기차 속에서 수십만 년의 그리움으로 남은 그대 어디로 실려 가는지. 실려 가는 그곳에서 그때 그 노래를 부를 수는 있는 건지

 

 노래로 늙어갈 줄 알았다면 그 말의 무늬와 바람의 색깔과, 차가운 새벽의 냄새를 기억해놓았을 텐데

 

 밤이 오고 또 밤이 가는데. 견디는 모든 것들은 화석이 되고 새들은 또 날고. 오늘 아침 철로변에서 그리움은 서리로 내리고. 또 그대는 견디기만 하라 하고

 

 그대의 날들은 너무 길고 길어서.

 

- <내가 원하는 천사>, 문지, 2012

 

 시집을 잡은 날도 오늘 같은 가을 밤이었습니다. 학교에서의 하루는 숨쉴 틈 없이 돌아갔고, 집에 돌아와서는 지쳐서 남은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시가 내게로 왔지요. 마치 천사처럼.

  별어곡, 이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낯설지 않아 찾아보니 정선선의 역 이름이더군요.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도 연상되었는데, 배경이 가물가물합니다. 나이를 먹은 것일까요.) 여기서는 노래라는 뜻이니 완전히 겹치지는 않습니다만, '別'이라는 글자의 느낌 때문일까요. 반짝반짝 빛날 것만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서늘함을 겹쳐 두 이름이 머릿속을 같이 맴돕니다.

 

 시간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지만 또한 시간에는 상대성이라는 게 있지요. 좋아하는 일로 몰입했을 때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가지 않던가요? 그래서 '나'는 '수십만 년의 그리움으로 남은 그대'를 그릴 수밖에 없습니다. 끝도 없이 기다리는 나. 그리고 견디기만 하라 하는 그대. 그래서 너무 길고 긴 날들만 내게 남아 있고요. 그 긴 시간 속에는 더 할 수 있는 말도 없습니다. 결국 노래로 늙어가기만 하지요.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그 말의 무늬와 바람의 색깔과, 차가운 새벽의 냄새'는 사실 자꾸만 떠올라 오가는 밤을 붙잡아두려 하고요.

 개인적인 감정이 자꾸 떠올라 무어라 더 마무리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누워서 다시금 시를, 시집을 들여다보는 게 좋겠습니다.

 

덧. 임제의 시 <無語別>도 함께 생각났습니다. (이종묵 교수의 번역을 따랐습니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이별의 상황은 또 어떠했을까요. 우는 것조차 소리낼 수 없었던 아가씨의 마음을 가만가만 헤아려 봅니다.

 

열다섯 아리따운 아가씨          五十越溪女 

 남부끄러워 말없이 헤어졌네.          羞人無語別

돌아와 겹문을 닫아걸고          歸來掩重門

배꽃 같은 달을 보고 우네.          泣向梨花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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