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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고전시가

향가 (5) - 원왕생가

by 玄月-隣 2011. 12. 15.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多可攴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攴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當作句而看)
阿邪 此身遣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달하, 이제                       달이 어째서
서방(西方)꺼정 가셔서                  '서방(西方)까지 가시겠습니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전(前)에                무량수불전(無量壽佛前)에
일러다가 사뢰소서                    보고(報告)의 말씀 빠짐없이 사뢰소서.
"다짐[誓] 깊으신 존(尊)을 우러러             서원(誓願)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두 손을 도두와                     두 손 곧추 모아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그릴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아으, 이 몸을 길이 두고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 이루실까 [젛사옵네]        사십팔대원(四十八大願) 이루실까.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문무왕 때에 불가의 도를 닦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광덕과 엄장이었다. 두 사람은 좋은 벗으로 항상 약속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극락세계로 가는 사람이 꼭 알리기로 하자."고 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에 은거하면서(혹은 황룡사의 서거방에 있었다 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신 삼는 것으로 업을 삼고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농사일에 힘쓰면서 지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은 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에 어둠이 깔릴 때, 엄장의 창 밖에서 "나는 벌써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둘러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풍악 소리가 나고 빛이 땅까지 뻗쳐 있었다. 그 이튿날 엄장은 광덕이 머물던 곳을 찾아가 보니 광덕은 과연 죽었다. 이에 그는 광덕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장사를 다 마치고 그는 광덕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남편은 이미 죽었으니 이제 나와 같이 사는 것이 어떻소?" 하자, 그 아내가 "좋습니다."고 대답하였다. 드디어 그날 밤 광덕의 집에 머물러 자면서 정을 통하려 하자, 그의 아내가 응하지 않고 하는 말이 "스님께서 정토를 구하는 것은 마치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격입니다."고 하였다. 엄장이 놀라면서 말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라고 안 될 것이 있소?"하자, 그녀가 말하기를 "남편은 나와 동거한 지 10여 년이었지만 일찍이 한 자리에 눕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추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매일 밤 몸을 단정히 하고 반듯이 앉아서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생각하였습니다. 혹은 16관(중생이 죽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닦는 16가지의 법)을 하여 관이 이루어지면 밝은 달이 문에 들어올 때 그 빛에 올라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정성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서방정토로 안 가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저 천 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 걸음에 알아볼 수 있는 법인데, 지금 스님의 관은 동쪽으로 갈 수는 있을지언정 서방정토로는 갈 수 없겠습니다."고 하였다.
 엄장은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나 곧 원효법사의 거처로 찾아가 정성껏 득도의 길을 물었다. 원효는 정관법을 지어서 권유하였다. 엄장이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한마음으로 관(미망을 깨치고 진리를 통달하는 것)을 닦아서 또한 서방 극락세계로 올라갔다. 정관법은 원효대사의 본전과 『해동고승전』 중에 있다. 광덕의 아내는 분황사의 종이었는데 바로 관음보살 십구응신 중의 하나다. 일찍이 광덕은 이와 같은 노래를 불렀다.

-『삼국유사』권5, 감통(感通), 광덕 엄장


 <원왕생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첫 줄 '月下伊底亦(월하이저역)'의 해독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과연 작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지요.

 먼저 첫 줄의 해독입니다. 향가는 향찰로 표기된 것이며 한자로 음 또는 뜻을 표기하지요. 따라서 어디에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해독에 차이가 나게 됩니다. 여기서는 '月下伊 / 底亦'으로 끊는 견해와 '月下 / 伊底亦'으로 끊는 견해가 있지요.
 전자는 다시 몇 가지의 뜻으로 세분화됩니다.
 첫째로 '달의 아래'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下伊(하이)'는 시간과 공간을 나타내는 처격 '-해'로 봅니다. 여기 사이시옷을 덧붙여서 현대어의 '-의'로 해독하지요. '底亦(저역)'은 '아래, 밑'이라는 '底(저)'의 뜻에 '亦(역)'을 음으로 읽어 '믿예'로 보고요.
 둘째로는 '下伊(하이)'를 '아리', 즉 '아래'로 읽고 '底亦(저역)'을 '저기'로 읽고 있습니다. '또한'이라는 뜻의 '亦(역)'이 어째서 '기'에 가까운 음으로 읽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_-;
 셋째로 '月下伊(월하이)'를 '다라리'로 읽는 것입니다. 중세국어에서는 쓰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발음나는 대로 붙여쓰는, 이른바 '이어적기'를 할 수 있었거든요. (예를 들자면 '손이'를 '소니'로 쓰는 것처럼요. 근대국어, 즉 개화기까지의 한글 문헌을 읽는 게 힘든 것도 이와 같은 표기상의 차이에서 오는 이유가 큽니다) 그래서 앞부분 전체를 '달이'로 읽고, '底亦(저역)'을 '엇뎨역', 즉 '어째서'로 풀이하지요. 중간에 왜 '엇'이 끼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후자의 경우 '月下 / 伊底亦'이라 끊고 '달하 이뎨', 즉 '달이여 이제'라고 해독하지요. '下(하)'는 중세국어에서 지금의 '-아'와 비슷하게 쓰였던 말입니다. 부르는 말 뒤에 붙는다는 건 똑같지만(이를 '호격 조사'라고 하지요) 높임의 뜻이 더해진다는 게 조금 다릅니다. 이를테면 용비어천가에서 '님금하 아라쇼셔'(임금이시여, 아십시오)와 같이 쓰이는 것처럼요. 그리고 '伊底亦(이저역)'은 '이제'로 간주합니다. 즉 서방정토 왕생의 염원을 직접 달에게 호소하는 노래, 라는 근거를 어학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쪽이 맞는지는 당대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입니다만, '기원'이라는 성격에서 그리고 '호소'라는 정서에서 이 편이 좀 더 묘미가 있다고 보이네요.

 작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의 설이 있습니다. 일부의 향가처럼 누가 불렀는지 모른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적 화자가 달라짐에 따라 해석의 양상이,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정토왕생을 갈구하는 염원의 성격, 기원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정서의 질 등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여기에 관해서 많은 얘기가 있었지요. 대여섯 가지의 견해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발단은 산문기록의 끝 문장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였지요. 원문은 '其婦乃芬皇寺之婢盖十九應身之一德嘗有歌云', 즉 위의 설화에서 밑줄로 표시된 부분입니다. (편의상 一과 德 사이를 끊어 읽었습니다. 물론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德(덕)'을 앞쪽에 붙여 읽으면 광덕의 처가 노래를 지은 것이 되며, 뒤쪽에 붙여 읽으면 광덕이 노래를 지은 것이 됩니다. 여기에 '有歌(유가)'가 과연 '作歌(작가)'와 같은 뜻인가 하는 논란이 추가됩니다. 광덕의 처나 광덕이 노래를 지었다는 쪽에서는 '有歌(유가)'가 '作歌(작가)'의 관례적 표현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작자를 모른다는 쪽에서는 같은 뜻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여기에 9줄의 '此身(차신)'의 문제도 추가됩니다. 과연 '이 몸'은 누구일까요? 광덕의 처든 광덕이든 지은이가 분명히 있다는 쪽에서는 지은이 자신이라고 말하지요. 반면 작자를 모른다는 쪽에는 극락 왕생을 바라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몸'이 될 수 있다는, 시적 자아의 집단성을 얘기합니다. 이런 논의 과정 속에서 광덕의 처는 보살의 화신이니 새삼 극락을 바랄 수 없으며, 표제 역시 <광덕·엄장>이라는 점에서 광덕이 지었다는, 즉 개인의 창작물이라는 설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작자를 모른다는 쪽은 집단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작품을 보고 있고요.
 학계의 주류는 <원왕생가>를 광덕의 작품으로 보며, 한 개인의 신앙적 발원을 형상화한 개인적 서정시라고 하지요. 특히 설화 속에서 '달'이 나오고 있으니 노래 속의 달 역시 그가 수행하던 실제 상황에서 보고 있던 달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험의 반영이랄까요. 특히 이 '달'은 이 세상의 나와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서의 기원 대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합니다. 반면 작자를 모른다는 쪽은 찬불가의 성격상 집단적 상상력이 표현된 것이라고 보지요. 특정 개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보편적·집단적 기원이라고 볼 때- 당대 삶의 고통을(기록은 신라 문무왕대, 라고 나와있습니다. 백제, 고구려, 그리고 당과의 전쟁까지 전란으로 가득한 시기였죠) 정토 왕생의 염원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당대 사회의 민중의 바람이 투영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종교쪽으로 치우치는 부분이 나오니 역시 가방끈이 짧은 게 또 표시가 나는군요. 음, 그치만 정말 궁금한 건 왜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으면서 10년 동안이나 광덕과 그 부인은 같이 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엄장의 모습이 좀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군요'ㅁ'

 덧. 역시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 역시 이와 유사한 모티브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를 이루기를 바라는 두 친구 - 각각 열심히 수도함 - 한 친구의 득도 - 다른 이의 득도'라는 전체 줄거리 안에 두 친구의 수도 정도를 알아보는 여인이 등장하게 되지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경우 부인이 아니라 야심한 밤에 한 여인이 찾아오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원효산설화>에서도 원효와 의상에게 비슷한 일이 있지요.

 다시 덧. 양주동 선생 해독의 [젛사옵네]는 원문에는 없지만 해독을 하며 집어넣은 것이라 합니다. 풀이하자면 나를 버리고 48대원을 이루실까 두렵습니다, 정도겠네요. 하긴 이 모진 세상에 나만 버려두고 극락왕생을 하시겠다니 충분히 두려울 법하지요.

 마지막 덧. 김완진 선생의 해독이 어학적으로는 더 근거가 있는 편이라고 합니다. 양주동 선생은 영문학 전공이고 김완진 선생은 국어학 전공이니 일단 기본 바탕에서 차이가 있지요. 어느 순간부터 교과서에서도 김완진 선생의 해독이 더 많이 보이더군요. 물론 영문학 전공이면서도 이 정도까지 해독을 하신 양주동 선생은 정말 국보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입니다. 이 분이 향가 해독에 뛰어든 것도 우리나라 옛 노래인데 일본인(소창진평. 오구라 신페이라고도 하지요)이 먼저 해독한 거에 화르륵 불타오르셔서 그랬다니 충분히 재미있으신 분이지요. 갹설하고, 그렇지만 김완진 선생의 해독에는 약점이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4-5줄에 나오는 '攴'자 문제입니다. 목판으로 인쇄할 때라 '支'자가 떨어져나가 '攴'자로 되었으며, 이는 앞의 글자를 특정하게 음으로 혹은 뜻으로 읽으라고 지정하는 '지정문자'라는 설이지요. 물론 원전을 바꾸어 해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정문자라고 본다고 해도 음/훈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 Written by 玄月 at 2008/08/11 00:22
+ Commented by 하늘바다 at 2008/08/12 13:35 
 원왕생가!!! 최악이었던 저번 실습 때 등산하면서 대규와 함께 읊조렸었지...................................점심도 우리 돈으로 사먹어야했던 우리들을 버리고 떠나신 박영민 쌤을 간구하면서ㅠㅠㅠㅠㅠㅠ점심만 사준신다면 우러곰 좃니노이다, 외치려고 했는데ㅠㅠㅠㅠㅠㅠㅠㅠ
+ Commented by 玄月 at 2008/09/03 00:22
 푸하하ㅋㅋㅋ 근데 이거 언제쯤 끝나려나 모르겠다ㅠㅠ
+ Commented by 한한 at 2008/08/23 02:03
 안녕하세요. 덧글 남기신 것을 이제서야 봤네요. 포스트 잘 읽었습니다.
+ Commented by 玄月 at 2008/09/03 00:2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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