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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고전시가

향가 (2) - 서동요

by 玄月-隣 2011. 12. 4.


善化公主主隱        善化 공주님은,        善花公主니믄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으기 얼어 두고,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薯童房乙          맛둥방을            薯童 방을
夜矣夘乙抱遣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가다.      밤에 알을 안고 간다.
                 - 양주동 해석           - 김완진 해석

 
제30대 무왕(서기 600-640)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홀로 되어 집을 서울 남쪽 못가에 짓고 살았는데 못에 있는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며, 도량이 한없이 넓었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생활해 나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그가 서울의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그는 마침내 이런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서동요>
 이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까지 알려지니 모든 신하들이 탄핵하여 공주를 시골로 유배시키도록 했다. 공주가 떠나려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공연히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서로 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고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 년 동안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었다."고 하였다.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서동이 "좋다."하고 금을 모았는데 그것이 구릉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가 머무는 곳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금만 가져오라."고 하여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곳에다 미륵삼존의 상을 세우고, 전탑(殿塔)과 낭무(廊廡. 전 아래 동서로 붙여 지은 건물)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간판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라 하였는데, 진평왕은 많은 공인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 (삼국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확실치 않다.)

-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무왕

 향가는 시가만 따로 존재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모든 향가들은 앞뒤에 설화와 함께 실려 있지요. 때문에 향가를 파악하려면 설화의 문맥 속에서 함께 파악해야 그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향가는 설화에 종속된 것이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어디까지나 서정시로서 연구하되 설화는 그를 돕기 위한 것 정도로 이해되네요.

 <서동요>의 설화는 단일 설화가 아니라 야래자(夜來者) 설화와 결연담, 그리고 사찰 연기 설화가 복합된 것이라고 합니다. 설화의 앞부분을 보면 홀로 된 서동의 어머니가 용과 통한다는 얘기가 나오지요. 용이 임금을 뜻하기에 당시의 임금이라 보는 쪽도 있지만, '밤에 (몰래) 오는 남자'의 이야기는 설화 속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이를테면 밤에 찾아오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진 처녀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옷에다가 몰래 실을 꿰어두라고 해서- 날 밝은 뒤에 찾아가봤더니 큰 지렁이가 있었고, 몇 달 뒤에 처녀가 아이를 나으니 그게 곧 견훤이었다, 이런 것 말이죠. (견훤이 역사의 승자였다면 '지렁이'가 아닌 '용'의 아들이 되었겠죠?) 이처럼 비정상적인 출생은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용자(龍子)로 태어나서 고난 - 무명의 세월을 거쳐 어여쁜 아내를 맞이하고. 쓰고 보니 고난이라기보다 염장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 을 극복하고 왕위에 등극한다, 는 영웅담 말이지요.
 중간의 부분은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서동요>는 여기서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지요. 말에도 힘이 있다고 믿던 시대이니 좋지 못한 소문으로 공주가 쫓겨난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미덥고 즐거'워서 홀라당 넘어가버린 공주님은 역시 순진하다고 해야 될까요;;; 그리고 끝부분은 미륵사 창건연기설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지요. 이 부분은 일연이 가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어디에서는 뭐라더라- 왕실 원찰인 미륵사를 보호하려고, 백제와 신라가 예전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라 꾸몄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주워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여러 가지의 설화가 한자리에 모였을까요. 아마 남녀간의 결연담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사적이나 지명과 결합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일종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한 장치랄까요. 노래 역시도 구애의 목적으로 가창되던 것이 서동 설화와 결합했을 것이라고 하네요. 즉, <서동요>의 지은이는 서동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전에 보았던 <황조가>에서 그렇듯이요. 물론 여기서는 서동이 실존 인물인지도 불분명하기에 '전승되던 노래를 그가 불렀다'라고 얘기할 수도 없지만요.

 사실 서동의 정체에 대해서도 얘기가 분분합니다. 실존 인물이라고 보는 쪽에서는 ① 무왕이라는 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중시하는 견해지요. 하지만 당시 백제와 신라의 적대적인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왕이 되찾은 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가 빼앗은 이후로 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말갈-고구려-백제-왜에 이르는 남북 동맹을, 신라는 한강 하류에서 당으로 가는 직항로를 이용하여 동서 동맹을 맺어 서로 앙숙보듯 하니까요. ② 동성왕이라는 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신라와 백제가 혼인동맹을 맺어 동성왕이 신라의 귀족(이찬 비지의 딸)을 맞이한 사실이 근거가 되지요. 동성왕의 이름 모대(牟大)의 우리말 발음이 '마둥'과 유사하다는 점도 있고요. ③ 무령왕이라는 설. 무왕(武王)에 주석으로 달아놓기를,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 했으나 백제에 그런 이는 없으니 무왕일 것이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이는 일연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고 무령왕이라 주장하는 쪽이 있는데, 교수님의 설명에서는 최근 발견된 외교문서에서 무왕이 자신을 무강왕으로 칭한 기록이 보인다고 하네요. (그치만 교수님, 그 근거는ㅠㅠ 최근이라면 언제이며, 그 외교문서는 어디에 있습니까-_- 웹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드네요;;) ④ 원효라는 설. 원효(서당)과 무왕(서동)의 이름이 비슷하다, 둘 다 노래에 능하다는 점, 둘 다 상대가 신라 공주이며 노래가 궁중에 퍼져 들어갔다는 점, 둘 다 절을 지었다는 점 등을 드는데 사실 좀 넌센스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예 역사상 실존하지 않은 가공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태어나서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출생담을 주축으로 한 영웅 이야기이므로 단순히 허구의 인물이 역사화되어 다시 전승된 것이라는 설, 동성왕과 신라 귀족의 혼인을 원래 소재로 삼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로맨스를 꿈꿨다는 설, 민요인 <서동요>에 특정 인물을 설정하여 마치 역사적 사건인 듯 이야기를 꾸민 것이라는 설 등이 있지요. 요즈음은 서동이 특정 인물이라고 하는 것보다 불특정 다수가 누구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주술화된 이야기를 향유했다는 것에 초점을 두는 듯합니다.

 즉, 정리하자면 이런 겁니다. 원래의 <서동요>는 아이들이 즐기던 전래동요지만, 서사적인 문맥 속에서 주술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요. 애초에 공동작이던 <서동요>가 - 현재에도 이와 유사한 양식이 남아있지요. 바로 '얼레리꼴레리~' 말입니다. - 설화의 주인공인 서동의 작품으로 제한되면서 유희적 성격의 민요가 주술적 성격으로 전이되었다고 말입니다. 소문을 사실로 믿게 하여 결국 소문이 사실이 되게 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술'의 여지를 엿볼 수 있지요.

 으에에@_@ 수업 들을 땐 재미있었고, 지금도 프린트를 보면서 공부하는 건 할만하지만 이걸 말로 풀어내자니 OTUL. 그저 공부를 한참 더 해야겠구나 생각할 뿐이랍니다ㅠㅠ

 덧. 원문 마지막 줄 세 번째 '夘'(누워 뒹굴 원)자는 원문에서도 잘 안 보인다고 합니다. 일단 저기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대로 김완진 선생의 견해를 따랐고, 저는 '卯(*卵? *夘?)'이라고 배웠습니다. 오구라 신페이 선생이나 양주동 선생은 '卯'(넷째지지 묘. 무성할 묘)로 읽고 부사로 보아 '몰래'라고 풀이하고, 홍기문 선생은 '卵'(알 란)으로 읽고 '밤으란(밤이면)'으로, 서재극 선생은 '卵'(알 란)으로 읽고 이를 남성의 고환으로 보아 '품었다'의 의미로 해석했다고 하는데-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시집도 안 간 공주가!"라고 노발대발하기엔 충분한 의미가 되네요'ㅁ'

 다시 덧. 고등학교 '국어' 책에 유일하게 나오는 향가가 <서동요>지요. 학습 활동을 옮겨봤습니다:)
'善化公主主隱'을 현대 국어로 풀어 보면 '선화 공주님은'이 된다. 이 구절을 중심으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혼자하기] 1. '主'는 다른 방식으로 두 번 쓰였다. 각각 음과 뜻을 어떻게 따온 것인지 말해 보자.
→ 첫째 번 '主'는 '주'라는 음을, 둘째 번 '主'는 '임금'이라는 뜻에서 '님'을 따서 쓰고 있습니다.
[혼자하기] 2. '隱'의 기능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 '隱'은 조사입니다. 그 중에서도 보조사(체언, 부사, 활용 어미 따위에 붙어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더해 주는 조사)라고 할 수 있지요. 보통 '은/는'의 경우 대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일이 많으나, 여기서는 그보다 주어의 의미, 즉 주제어를 나타내준다는 것이 더 맞겠습니다.
[함께하기] 3. '隱'의 기능에 비추어 보아 이전 시기의 고유 명사 표기와 향찰 표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사람의 이름이나 땅의 이름을 표기했던 것을 '고유 명사 표기'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향찰은 문법을 나타내는 요소, 즉 어미와 조사까지도 표기했다는 점에서 우리말 문장을 더 체계적으로 표기했다고 하지요.

- 고등학교 국어 下권 : 1. 국어가 걸어온 길 (1) 고대 국어(古代國語) 25쪽
  

 또 덧(이건 진짜 마지막!). 블로그에서는 옛한글이 안 먹혀서-_- 첨부한 한글파일에 설화 원문과 양주동, 홍기문, 김완진의 번역을 올려두었습니다. 옛한글이 낯설긴 하지만, 현대어 번역해둔 건 영 원래의 맛이 안 나서 말이죠. 그렇지만 가지고 있는 게 1차자료가 아니라서;; 혹시나 잘못된 게 보이시면 말씀해주세요. 찾아보고 수정하겠습니다.

+ Written by 玄月 at 2008/07/29 15:42
+ Commented by ^^ at 2011/03/22 22:32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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