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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고전시가

향가 (6) - 모죽지랑가

by 玄月-隣 2011. 12. 19.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逢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간 봄 그리매                        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
모든것사 설이 시름하는데,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아름다움 나타내신                      殿閣을 박히오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내다.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 가도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눈의 돌음 없이 저를
만나뵙도록 (기회를) 지으리이다.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郞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일                郞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다복 굴헝에서 잘 밤 있으리.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제32대 효소왕(692-702) 때에 죽만랑의 낭도 중에 득오(혹은 곡이라고도 한다)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는 날마다 출근하여 정진하고 있었는데 한 열흘 동안이나 보이지 않자 죽만랑이 그 어머니를 불러서,
 "그대의 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그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당전으로 있는 모량부의 익선 아간이 아들을 부산성 창직으로 차출시켜 급히 달려가느라 미처 낭에게 하직 인사를 못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죽만랑은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거기에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만 공적인 일로 갔으므로 마땅히 찾아가서 대접해야 겠소."
하고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좌인(방언으로는 개질지라 하니 종을 말함이다)들에게 들리워 득오를 찾아갔다. 낭도 137명도 모두 의례를 갖추어 그를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자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대로 부역하고 있습니다."
고 하였다. 죽만랑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대접하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같이 돌아오려 하였으나 익선은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에서 조세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중히 여기는 정을 아름답게 여기고 변통성이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생각하여 거둔 벼 30석을 주며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진절 사지가 타던 말과 안장을 주니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조정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이가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추한 짓을 씻겨주려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하여 숨어버려 대신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동짓달 몹시 추운 날 그를 성 안의 못에다 목욕을 시켰더니 얼어죽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어명으로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 버리고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승복도 입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승려가 된 자가 있어도 큰 절에는 들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간진의 자손은 평정호의 자손(枰定戶孫)으로 삼아 특별히 표창하게 하였다. 원측법사는 해동의 큰 스님이지만 모량리 사람이므로 승직을 주지 않았다.
 처음 죽지랑의 아버지 술종공이 삭주 도독사가 되어서 임지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삼한에 병란이 일어나 기병 3천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하였다.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고개의 길을 닦고 있어 술종공이 그것을 보고 찬미하였다. 거사도 역시 공의 위세가 혁혁함을 좋게 여겨 서로의 마음이 감동되었다. 술종공이 부임지에 간 지 한 달이 되었는데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랍고 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었더니,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다."
고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죽은 그 날이 꿈꾼 날과 같았다. 술종공이 생각하기를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라 하고 군사들을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그를 장사하게 하고, 그 무덤 앞에 돌미륵 하나를 세웠다. 술종공의 아내는 꿈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죽지는 자라서 벼슬길에 나아가 유신공과 함께 부원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무 4대 조정에서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가 있다.

-『삼국유사』권2, 기이(紀異), 효소왕대 죽지랑


 <모죽지랑가>는 죽지랑('죽만랑'이라고도 합니다)을 사모하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앞으로 볼 <찬기파랑가>와 같이 화랑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요. 지은이는 득오라는 낭도입니다. 향가의 지은이가 향가의 배경 설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존 인물이 아닐 것이다, 라는 의견도 있는데 <모죽지랑가>의 배경 설화를 보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실제로 배경 설화 어디에도 까마귀와 관련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모죽지랑가>의 어석에서는 창작 시기가 큰 쟁점입니다. 이는 시적 화자의 정서의 질을 결정하며 나아가 <모죽지랑가>의 성격과도 관련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모시로 보고 있는 양주동 선생의 견해를 볼까요. 배경 설화의 마지막 줄, '처음에'라는 부분이 득오가 익선에게 끌려가 있을 때나 그 이전을 의미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지요. 그렇게 본다면 여기서 '간 봄'은 득오가 죽지랑과 보냈던 좋은 시절입니다. 지난 날 죽지랑의 당당했던 모습을 화창했던 봄에 비유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처럼 수려했던 모습이 '주름살을 지니려' 합니다. 지난 날과 대비되는 모습 - 세력을 잃고 무력해진 모습을 안타까워 한다고요. 그렇지만 살아있으면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질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다북쑥 우거진 구렁', 즉 개인적인 시련인 동시에 화랑도가 고통을 겪는 상황인데도 재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는 않고 있지요.
 반면 김완진 선생은 추모시로 보고 있습니다. 효소왕 초에 죽지랑이 죽자, 그의 부재와 상실의 심정을 객관화시킨 일종의 추도시 혹은 만가(輓歌)라고요. 그렇게 본다면 '간 봄'은 죽지랑이 살았던 좋았던 날들이며, 이처럼 다시 못 올 지난 날이 기억 속에서 퇴색해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지요. 5-6행에서의 만남은 추억 속의 재회, 혹은 이승에서 못 다 이룬 회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피안에서의 재회를 의미하는 거고요. 그리고 이후의 '다복 굴헝'은 무덤입니다. 머지 않아 낭의 무덤 곁으로 함께 묻혀 갈 것을 얘기하고 있지요.
 어떻게 보든지 간에 현재의 상황은 예전의 좋을 때와 대비됩니다. 이는 삼국통일 이후 화랑도가 서서히 쇠락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지요.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당 전쟁이 끝난 게 676년입니다. 그리고 효소왕의 재위기간은 692년부터 702년까지고요. 그 30여년 간 화랑도는 작아집니다. 이미 국내가 안정된 이후의 무력집단은 지배자에게 부담이 될 따름이니까요. 한 때 7천여 명에 달했다는 낭도는 줄어들고, 화랑의 부탁을 일개 관리가 듣지 않을 정도의 모습. 그 앞에서 노(老)화랑은, 낭도들은 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보니 개인적으로는 사모시/추모시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보다 화랑단의 성쇠와 연결시키는 설명이 더 재밌었더랬지요.

 또 하나의 쟁점은 <모죽지랑가>가 10구체일 가능성입니다. '개관'에서도 잠깐 설명했지만, 8구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요. 일찍이 홍기문 선생이 균여 향가와 같은 형식의 노래와 그 이외의 노래, 두 종류가 있다며 <모죽지랑가>를 전자에 포함시켰고, 성기옥 선생도 8구체를 부정합니다. 이 분은 <처용가>의 경우 4구체의 연속으로, <모죽지랑가>의 경우 일부가 빠진 것으로 보고 있지요. 사실 일리는 있습니다. <모죽지랑가>는 다른 향가와 달리 행갈이가 된 채로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으며, 구절을 보입(補入)할 경우 10구체 향가의 전형적인 3단 구조로 재구성되고 9행 첫머리에 감탄사가 오게 되지요. 게다가 최근에는 '去隱春'의 '去隱'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앞의 어석들은 동사(去)+관형형 어미(隱)+명사(春)으로 해석하여 '가는 봄/간 봄'이라고 풀이했는데, 차자표기의 전반적인 정황을 보아 '-去隱'이 보조용언 혹은 하나의 어미일 거라고 하네요.
 『화랑세기』에도 8구체 향가가 있다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자세한 건 좀 더 연구를 해야 알 수 있겠지요. 『삼대목』의 소실이 다시금 안타까워지는 순간입니다, 네. 물론 지금 발견된다면 갑자기 늘어난 어마어마한 시험 범위에 좌절해버리겠지만요.

+ Written by 玄月 at 2008/10/26 23:08
+ Commented by 아침의전령 at 2008/10/27 00:24
 헤에, 모죽지랑가에 이렇게 긴 이야기가 있었군요 'ㅁ'/ 전 그저 8구체-_-a 향가 중 하나라는 것밖에 몰랐는데<
+ Commented by 玄月 at 2008/10/27 23:08
 보통 향가 배경 설화랑 어석 다 합치면 원문의 열 배는 가뿐하게 넘어주시지. 1주일에 4시간씩 5-6주간 수업을 들어도 겨우 맛만 볼 정도랄까-_-
+ Commented by 향가 at 2008/10/27 07:49 
 향가는 신라인과 고려인들이 현대인에게 내린 영원한 저주.
+ Commented by 玄月 at 2008/10/27 23:08
 저도 절실하게 동감합니다ㅠㅠ
+ Commented by 뽀도르 at 2008/10/28 13:35
 일본의 만엽집 같은 게 우리한테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런지 -_-;;
+ Commented by 玄月 at 2008/10/29 00:14
 갑자기 교수님이 '<삼대목>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추리 소설을 쓰라는 과제를 내시려던 게 생각나는군요^^; 다들 결사반대해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사실 아쉽긴 합니다. <삼대목>이 남아있었다면 향가 연구의 폭이 훨씬 넓어졌을텐데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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