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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19

광장(최인훈) 2007년 11월 작성. 내가 만난 이명준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살아 움직이는 바다. 그 바다 위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사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이란 얼마나 많은가. 거리에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부터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잊지 못할 사람까지 수천 명이라는 말로는 모자랄 터. 그런데 왜 나는 40여 년 전 잠깐의 인연이었던 그를 잊지 못하는가. 아마도 인훈의 말처럼 그가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늘 현장에 있으려고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동안 그를 보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얘기하고 싶다. 결국 살아 움직이는 바다 .. 2014. 8. 6.
그늘(김영태) 나는 그의 그늘에 가서 그가 나를 멀리한 이후의 그늘 안의 그늘로 남아있었습니다 그의 살 속에 遮陽을 매달고 6년 동안 촛불을 켜놓고 살던 것도 지금은 희미해진 그의 몸 지도 위 나 쉬어가던 곳도 그늘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지팡이 짚고 모자 쓰고 넉넉한 옷 가을 같은 옷 입고 지도도 필요 없이 가끔, 아주 가끔 나 살던 집을 찾아갔었는데 - , 문지, 2000 '아주 가끔' 찾아간 '나 살던 집'은 그 언젠가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고 '가엾은 내 사랑'만이 갇혀 있는 빈집이었겠지요.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그늘을 '반 근' 정도로, 적당하다 말할 수 있을까요. (10/08/28) 4년만에 시집을 새로 잡았습니다. '그' 문지 200번대 시집들을요. 그 동안 바뀐 것들을 돌아봅니다. 적막한 연구실에서 번.. 2014. 8. 5.
천둥벌거숭이 노래 1(고정희) 지도에도 없는 숲길을 갑니다 태양이 호수에서 금발을 흔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바흐의 악보를 오솔길에 깔았더니 무반주 첼로의 서늘한 그림자가 지구의 머리칼에 고요히 걸립니다 내가 당도할 문은 아직 멀었습니다 숲에 별 뜨고 바람 부는 밤 모든 언어에 빗장을 지른 뒤 찔레꽃 향기가 심장을 가릅니다 어둠뿐인 하늘에 당신을 그립니다 오늘밤은 이것으로 따뜻합니다 - , 문지, 1994(재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며, 심장을 가르는 찔레꽃 향기를 느끼는 밤. 그야말로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로구나. +) 시집 뒤편, 시인의 말. 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밤하늘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별빛처럼 아름답게 떠 있고, 날이.. 2014. 3. 4.
고통의 축제 2 中에서(정현종) 그림자가 더 무거워 머리 숙이고 가는 길 피에는 소금, 눈물에는 설탕을 치며 사람의 일들을 노래한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이어니 - , 문지, 1995(재판)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에 문득 동의하고 만다. 짧지도 않은 교원대의 가을이 왜 이렇게 길기만 한지. (08/10/18) 아마 늘 그랬듯 스산한 가을날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계절보다 마음이 더 시렸을 테지요. 그래서 치기어린 나이에 시인의 말에 동의를 했을 지도요. 물론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피에 소금을 친다면, 눈물에 설탕을 친다면 무슨 맛일까 하고요. 간간한, 그러면서도 끝에 쇠맛이 약간 감도는 피. 무색무취무미인 듯하지만 혀끝에 알게 모르게 아린 맛을 남기는.. 2014.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