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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시를 읽는 밤

봄(오규원)

by 玄月-隣 2013. 10. 21.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문지, 1994

 

창밖에는 목련이 어느새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젠 정말 봄이다, 봄. (08/03/11)

 

 한동안 봄만 되면 못 견디게 몸이 근질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다투어 피는 봄꽃들이 마음을 간질였던 탓일까요.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라는 말이 참 반가웠던 건 그 때문이었지요. 언어와는 상관없이, 아니, 언어를 뛰어넘는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려나요. 말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봄 기운들. 그 기운 속에서 스스로의 가난한 언어들도 어느새 함께 날아다니던 그런 행복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목련, 매화, 벚꽃,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수수꽃다리, 아그배… 창밖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싱그럽던 캠퍼스의 시간들이 문득,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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