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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고전시가

향가 (8) - 원가

by 玄月-隣 2012. 1. 4.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
行尸浪阿叱沙矣以支如支
皃史沙叱望阿乃
世理都之叱逸烏隱苐也
後句亡

「뜰의 잣[柏]이                    質 좋은 잣이
가을에 안 이울어지매                   가을에 말라 떨어지지 아니하매,
너를 어찌 잊어?」하신,                 너를 重히 여겨 가겠다 하신 것과는 달리
우럴던 낯이 계시온데,                  낯이 변해 버리신 겨울에여.
달 그림자가 옛 못[淵]의                 달이 그림자 내린 연못 갓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                  지나가는 물결에 대한 모래로다
얼굴사 바라보나,                     모습이야 바라보지만
누리도 싫은지고!                     세상 모든 것 여희여 버린 處地여.
     - 양주동 해독                            - 김완진 해독

 효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현명한 신하 신충과 함께 궁중 뜰의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다가 말하기를,
 "뒷날에 내가 결코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을 이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겠다."
고 하니 신충은 일어나 절을 했다. 몇 달이 지나 왕으로 즉위하고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줄 때,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못했다. 신충은 이를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그랬더니 잣나무가 갑자기 누렇게 되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잣나무를 살펴보도록 하였더니 나무에서 노래를 찾아내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면서
 "정사가 너무 복잡하고 바빠서 공신을 잊었구나."
하고 신충을 불러서 벼슬을 주었다. 그러자 그 나무는 다시 살아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원가>
 이로부터 두 임금께 총애를 받았다.
 경덕왕(효성왕의 아우) 22년(763) 계묘에 신충은 두 친구와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남악으로 들어갔는데 두 번씩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거기에서 살았다. 그가 평생을 산 속에서 숨어 살면서 대왕의 복을 빌겠다고 원하므로 왕도 이를 허락하였다. 단속사의 금당 뒷벽에 영정을 모셔 두었는데 그것이 곧 경덕왕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절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삼화상전에 보면 신충의 봉성사가 있는데 여기와는 서로 다르다. 따져보면 신문왕 대는 경덕왕 대를 지난 지 이미 백여 년이 되었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이 과거세의 인연이 있다 함은 이 신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잘 알아 밝혀야겠다)라 한다. 또 딴 기록에는,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 했다)이 일찍부터 발원하여 나이 50이 되자 마침내 출가하여 절을 지었다. 그는 천보 7년 무자에 50의 나이로 조연사의 작은 절을 큰 절로 고쳐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하였다. 그 절에서 산 지 20년 만에 죽었다 하니 삼국사의 기록과는 같지 않다. 두 기록을 다 실어두어 의아한 점을 덜고자 한다. 찬을 하자면,

공명은 다하지 못했는데 귀밑머리 희어지니
임금의 사랑은 많다 해도 나이는 바쁘구나
언덕 너머 산 그림자 꿈에 자주 뵈니
올라가 향불을 받들어 우리 임금 축복하리

- 『삼국유사』권5, 피은(避隱), 신충 괘관

 신충이 관(冠)을 걸었답니다. 어디에, 왜일까요. 그를 직접 만날 수 없으니 믿어야 할 건 남아있는 자료뿐이지요. 배경설화를 보니까, 이런. 왕이 약속을 어겼네요. 한식의 유래가 되었던 개자추와 비슷한 상황에서 신충은 노래 한 수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붙은 잣나무는 누렇게 변합니다. 아마 이 잣나무는 왕과 신충이 바둑을 둘 때 그늘을 만들어주었던 그 나무였겠지요(불쌍해라! 나무는 또 무슨 죄람). 왕은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봅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일을 바로 잡자 죽어가던 나무까지도 되살아나지요.
 하지만 왕이 그냥 까먹었을까요? 그것도 불과 몇 달만에요? 그래서 당시의 정치 상황과 결부시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답니다. 33대 성덕왕 이후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외척세력의 의사에 반(反)할 수 없었던 효성왕이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고요. 이렇게 본다면 6행의 '물결'은 외척세력을 비유하는 말이 되며, 왕이 <원가>를 받아본 후 신충에게 벼슬을 준 것도 이들의 양해하에 이루어졌을 거라고 하네요.

 이처럼 배경설화와 함께 작품을 볼 때 <원가>를 주술적인 성격을 가진 노래라고 분류하지요. 하지만 이전 시기의 <구지가> 같이 '보편적'인 것을 위하지는 않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으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지요. 한편으로는 관리의 노래라고 합니다. 자기희생적 화랑도 정신이 유교적 공리주의로 바뀌면서 개인의 입신양명을 드러내는 노래라고 보고 있지요. 왕과 신하의 얘기가 나올 때 당연한 듯 따라나오는 연군시가라는 말도 있고요. 그러나 노래 자체를 놓고 봤을 때에는 서정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늘 푸른 잣나무를 보며 다짐한 약속이 냉담하게 변한 것으로 인한 삭막한 심적 상태를 서술하며, 모든 것을 체념한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읊었다고요.

 노래를 조금 더 살펴볼까요. 1-3행에서는 왕의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가을과 잣나무가 대비되며, 잣나무가 가지고 있는 '불변'이라는 속성이 더 강조되지요. 또한 이 잣나무는 주술적인 상관물이기도 합니다. 배경설화에서 죽었다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잖아요. 가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언령'이라는 것, 그리고 말의 힘을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쨌든, 왕의 모습은 그때와 다르게 변해버렸습니다. "우럴던 낯이 계시온데"라며 말을 잇지 못하든(홍기문 선생의 해독에서는 "우럴던 그 낯이 고쳐질 줄이야"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요. '改'를 음으로 읽는지 뜻으로 읽는지의 차이로 보입니다), "낯이 변해 버리신 겨울에여"라고 얘기하든 왕이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지금이었다면야 '님아, 이러기임? 나랑 장난하셈?'이라며 드잡이질이라도 하련만, 그랬다간 정말 목이 날아가게요. 그저 고요한 연못에 물결이 이는 상황을 그리며 복잡다단한 정치적 파란이 왕과 자신을 갈라놓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양주동 선생의 해독을 따라가자면, 이후 7-8행은 왕의 모습을 예전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으나 가망이 없다는 한탄의 목소리로 끝을 맺고 있지요. 세상 모든 게 다 싫다며 원망을 외부로 돌리고 있습니다. 반면 김완진 선생의 해독을 따라가면 6행에서 이미 물결(세파)과 모래(세파에 휩쓸리는 보잘 것 없는 자신)가 대비되며, 이어서 상황에 대한 원망보다 비참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 드러나지요. 개인적으로는 내면을 응시하고 있는 후자쪽이 좀 더 마음에 들었답니다.

 남아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8구체 논란이 있을법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부터 뒷부분은 실전되었다고 표시되어 있으니 10구체 향가로 분류되고 있답니다. 보통 10구체 향가는 9-10행에서 시상의 마무리가 이루어지므로, 이런 자신의 심사를 어떻게 달래려고 했는지 신충의 내면이 무척이나 궁금해지네요.
 <원가> 이후, 경덕왕대의 산문기록은 향가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수업을 들을 때에는 경남 산청의 단속사 연기 설화이며, 아마도 일연 스님이 덧붙이지 않았을까, 라고 하시더군요.

 와아, 이렇게 해서 다음부터는 경덕왕대로 넘어갑니다. <제망매가>나 <찬기파랑가> 같이 개인서정시로서 향가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이 등장하는 시기이지요. 시험도 끝났으니 달려보자! 라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아직 학기가 남아 있어서 여전히 띄엄띄엄 갈 것 같네요^^;

+ Written by 玄月 at 2008/11/1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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