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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상/보고 듣고 생각하고

2007년 여름. 제국의 뒤안길을 걷다 - 발걸음 셋. 발해를 꿈꾸며. 그리고…

by 玄月-隣 2015. 3. 22.


 여섯 째 날은 청산리 전투 터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 직소택. 무성한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며 독립군의 심정뿐만 아니라 어디서 나올 지도 모르는 적과 싸워야 되었을 일본군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원래 직소택에 가기 전, 백운평이라는 곳에 20여 호의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마을을 몰살시켜 지금은 빈 들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에 일어난 경신대토벌로 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아픈 그 역사들을 생각하자니 앞을 가리는 건 한숨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찾아간 곳은 일송정. 바로 <선구자>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정자가 썩 좋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일단 넘어가고, 옆에 서 있는 소나무가 그 ‘일송’인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원래의 소나무는 워낙 독립 운동가들의 성지 비슷하게 되다보니 일본군이 독약을 풀어서 말려 죽여 버리고 지금 있는 건 그 후손 뻘이라고. 다 같이 여기서 선구자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글쎄. 내게는 멀리 보이는 공동묘지 그 어디쯤에 있다는 윤동주의 무덤이 훨씬 와 닿았다.


 다음 여정은 용정중학교였다. 원래부터 있던 건물이 무척 예쁜데, 보존을 위해 전시관의 용도로만 사용한다고 했다. 실제 수업은 그 옆의 새 건물에서 이루어진다고. 이곳에서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의 흔적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시>의 시비부터가 그랬고, 그의 모습과 유물이 남아 있던 전시관에서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한가득 밀려왔다.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보던 곳은 저 언덕 어디쯤이려나.


 그리고 봉오동 전투 터. 안내자가 없었다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청산리 전투 터와는 달리 중국 정부에서도 인정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반면 봉오동 전투 터는 그 정확한 격전지를 모른다고. 

 사실 봉오동 전투는 그 자체의 전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항일 무장 투쟁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다. 무기를 들고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숨진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과 부모처자를 버리고 이곳에 온 독립군뿐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의 광풍에 휩싸여 강제로 동원되어 온 일본군들 역시도 추모하며 또 하루의 여정을 마쳤다.



 일곱 째 날은 본격적인 발해 유적 답사. 현지인들은 남대묘라고 부르는 흥륭사를 찾아갔다. 절 자체는 청나라 때 다시 지어진 건물이지만, 여기에는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발해 석등이 있단 말씀. 사진으로만 대하던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생기발랄한 느낌이었다. 유홍준의 부도 비유에 따르자면 빨간 하이힐을 신은 막내 딸 같다는.


 절 한쪽 구석에는 잠겨있는 집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에 유물 같은 것들이 보이길래 교수님께 여쭤봤더니 아직 검증이, 그리고 정리가 끝나지 않은 유물들이라고 말하신다. 궁금하지만 별 수 있나.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발해의 가장 오랜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원래 성벽의 위 아래로 보호석을 덧대어 놓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 게다가 안내판에는(간체자를 읽을 수 있다! 그토록 힘들고 짜증났던 동양사강독의 결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 발해를 당나라 때의 지방 정권 중 하나라고 써두고 있어서 좀 열받기도 했었고. 제6궁전까지 있는 이곳에서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건 제1궁전 터까지라고 한다. 내부에서는 ‘도굴식 발굴’로 파괴되는 부분이 많아 뜻있는 사람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고 들었다. 어쨌든 성벽 위에 올라가니 생각보다 그 폭이 넓음에 놀랐다. 세로로 5개 가로로 10개의 주춧돌이 주욱 늘어서 있는데, 각 돌의 거리는 2m 정도. 원래 있었을 누각의 모습까지 함께 생각하자니 그 위용에 그저 경탄을 금치 못할 뿐이었고.


 발해의 특징을 나타내는 기와 또한 찾아본 뒤 옆에 있는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상경용천부의 복원 모형과 함께 문자 기록, 생활용품, 군사용품, 불교용품 등 다양한 물건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보다 눈길을 끄는 건 정효공주묘의 고분벽화였다.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지만 여전히 느낄 수 있던 그 호방함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발해 그리고 고구려를 얘기하며 빠질 수 없는 것은 동북공정이다.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났던 일은 모두 중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동북공정. 여기에 우리는 어떤 논리로 대응하고 있는지. 그저 감정만이 앞서서 사건이 생기면 불타올랐다가 잠시 뒷면 또 가라앉고 하는 것은 아닌가. 발해의 멸망 이후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 일부만 고려로 넘어갔을 뿐 대다수 피지배층인 말갈인은 요나라를 세웠고, 이후 금, 원, 명, 청을 거쳐 현재의 중화민국으로 흡수된 것이라는 중국의 논리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나. 결국은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 뿐. 실제로 설명을 해주신 교수님께 이와 같은 생각을 얘기하며 학자로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여쭤보았을 때, 그 분의 대답 역시도 같은 맥락 속에 있었다. ‘정치적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학자의 양심에 따라서 소신을 지켜라.’ 그러려면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내 것으로 하는 수밖에.


 돌아가기 하루 전인 여덟 째 날. 날씨가 맑다는 얘기가 들리면 바로 천지로 가기 위해 일정을 여러 모로 조정해서 빠듯하게 돌아다녔지만 결국 실패하고, 대신 보다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발해에만 있는 독특한 유물 중 하나인 24개석을 본 것도 이날. 8개씩 3줄로 늘어선 돌은 무엇에 쓰이는 건지 그동안 갑론을박을 벌였으나, 지금은 역참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람 키를 넘는 옥수수 밭은 물론 장관이었지만 유적이 남의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건 어째 좀 씁쓸했다.


 그리고 연길의 가장 번화한 시장인 서시장도 구경할 수 있었다. 시장통의 작은 길 곳곳을 헤매고 다니며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던 시간들. 어디서나 시장의 모습은 비슷하더라.


 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도문에서 심양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밤새 달리기!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만큼 박진감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1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있는 건 결코 편한 일이 아니었다. 우등은커녕 우리나라 일반고속보다도 훨씬 좁은 좌석 간격은 내 짧은 다리도 구겨 넣기 힘들었고, 덜컹거리는 길과 배겨오는 엉덩이는 툭하면 잠을 깨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너른 들을 달려 나가는 밤기차는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다음번엔 기차를 타고 중국 일주를 하겠다는 야무진 꿈이 하나 생겼다.


   여행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것이다. 
   또 여행은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여행은 나를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
   글 속엔 미처 다 담아내지 못했지만 함께 여행했던 많은 사람들,
   짧은 여정에 넘치도록 보고 들었던 관심사들과 그들이 불러일으킨 생각.
   그리고 그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 것을 넘치도록 고민할 수 있었던 나.
   모래바람을 먹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웃을 수 있던 것은 그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