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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상/보고 듣고 생각하고

2007년 여름. 제국의 뒤안길을 걷다 - 발걸음 하나. 아, 고구려!

by 玄月-隣 2015. 3. 22.

 심양 공항에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던 건 낯선 냄새였다.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와 있다는 걸 여실히 알게 해 주는. 그 낯설음에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다.


 가장 먼저 볼 수 있던 곳은 연주산성이었다. 흰 돌로 되어 있다고 해서 백암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요동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라고 했다. 연개소문이나 양만춘으로만 기억되는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에서도 톡톡한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치(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해서 성벽 밖으로 쌓은 돌출부)라던가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공격함), 옹성(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 원형 또는 방형으로 쌓은 작은 성)과 같은 고구려 성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성이었다. 특히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돌을 서로 맞물리게 쌓아서 한 두 개의 돌이 빠지더라도 성벽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리는 일은 없도록 한 고구려 성벽은 인상적이었다. 꽤나 폭이 넓었던 성벽 위를 걸으며 이러한 요새를 쌓고도 안심할 수 없었던 삶이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다.


 둘째 날의 첫 답사지는 오녀산성이었다. 다들 잘 알다시피 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며, 첫 도읍지가 바로 이 곳. 해발 800미터 정도에 자리한 이 성은 그 규모나 위치 등으로 볼 때 초기 고구려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추측하게 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온돌. 중국의 입식 문화와는 다른 우리의 좌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온돌이 이 시기부터 등장하고 있다. 답사 기간 내내 설명해 주신 방학봉 교수님에 의하면, 온돌의 개수는 직급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군장을 풀고 잘 틈도 없는 병사들의 경우는 2줄 정도이며 장군급이 되면 4~5줄로 온돌이 놓여서 좀 더 아늑했다고.


 다음 목적지는 환도산성. 고구려의 성은 대부분이 평지성과 전쟁을 대비한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환도산성은 고구려 국내성과 짝을 이루는 산성이다. 여기는 전망대까지만 간단하게 다녀오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화사하게 핀 들꽃들이 참 예뻤다.


 그리고 찾아가 본 산성하 고분군. 초기 고구려 시대 무덤들이 즐비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돌무지무덤들과 고구려시대 유적이라는 무자기 8각 비석(과연 글자가 없는 것도 비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을 볼 수 있었다. 돌들에 질려서 사진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니 패스. 저녁은 조선족 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옆으로 보이는 야시장과 주점은 흥을 돋웠다. 그러면서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이라는 <불놀이>의 한 대목이 생각난 건 직업병이지 싶다.


 셋째 날 아침은 국동대혈에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했다. 원래 고구려의 왕들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은 좀 더 위쪽의 통천문인데, 일단 이 곳으로 만족. 이어 ‘고구려’라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유적들을 보기 위해 출발했다.


 먼저 들른 곳은 국내성. 하지만 국내성에서는 성이라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다. 철책으로 둘렀긴 했지만 사실 가정집 마당인지 유적지인지 구분이 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나마 이게 집안시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며 정리한 거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예전에는 성벽 바로 밑을 흘렀을 통구하마저 한참 떨어진 곳을 흐르고 있었으니 성답다는 느낌은 더욱 멀어질 밖에. 문득 우리는 말로만 ‘대제국 고구려’를 외치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런 모습을 알고 좀 더 나은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어서 간 곳은 장군총. 이름답게 어마어마한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사진 한 장에 담으니 저렇게 보이지만 높이가 31.34m이고, 바깥에 세워진 저 돌들만 해도 가장 작은 게 15톤이라고. 게다가 오로지 돌, 그것도 강돌로만 이루어진 무덤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공이 들어갔을 지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돌들이 밀리지 않게 가장자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일정하게 파냈는가 하면 돌을 단순히 쌓은 게 아니라 짜 맞춘 다음 마지막에 쐐기를 박듯 마무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유명한 광개토대왕비. 방탄유리 속에 얌전히 서 있는 비석은 멀리서가 아니면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요즘 이 비석의 주인공은 어떤 판타지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관심 있다면 조금 더 찾아보시고.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광개토대왕비가 고구려 건국 이야기․광개토대왕의 업적․수묘인(무덤을 지키는 사람)의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는 것, 아직까지도 비문변조설이 심심찮게 돌아다니는데 이미 무덤 속에 들어갔어야 할 이야기가 부활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린 문제라는 것 정도이다. 굳이 한 마디 더 붙이자면 변조된 것은 비 자체가 아니라 탁본된 내용이라는 것.


 고구려, 하면 고분 벽화 역시도 빠질 수 없다. 유일하게 일반인에게도 개방이 되어있다는 오회분 5호묘. 하지만 관리 상태는 엉망이라서 결로(물건의 표면에 작은 물방울이 서려 붙음) 현상이 차마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였다. 해마다 색이 바래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는 안내자의 말이 쓸쓸하게만 들렸다. 들어가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현무를 비롯한 사신도, 모줄임 구조의 천장 곳곳에 그려진 연꽃과 불꽃, 일월신, 농경신, 북두칠성들을 어느 날에는 볼 수 없게 된다니. 안타까웠다. 오죽했으면 중국으로 귀화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대학원에서 한국어 교육을 전공해서 중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고구려․발해 유적지를 돌아보고 연구하는……. 하긴, 쉽게 될 리가 없지. 입을 삐죽이며 돌아섰다.